제주 비자림
숲길을 찾아온 곳이 비자림이다. 입으로만 들었을 뿐 처음이다. 이름만 보면 비자나무가 있는 숲일 텐데 어떤 나무일까, 궁금하다. 비파나무처럼 잎이 넓은 상록수 일 거라는 상상을 그려가며 찾았다. 숲은 오래된 자연의 모습이다. 산책로를 제외하고는 자연 그대로 모습으로 보인다. 평일이라 생각보다 한산하다.
월요일 낮 시간에 숲에 올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아주 특별한 호사이다. 월요일은 늘 분주한 날이다. 휴식 뒤에 남겨둔 일들이 기다린다. 어떤 날은 할 일들을 번호를 적어가며 기록하고 정리한다. 또 다른 날은 첫 주를 시작하는 주간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런 날에 햇빛을 맞으며 숲 냄새를 맡는다는 자체가 행복하다.
산책로 입구에서 안내 표시판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비자 나뭇잎을 찾아 우듬지를 쳐다본다. 우듬지는 막힘없이 하늘이 열려있다. 하늘을 가릴 잎은 하나 없이 뾰족 잎이다. 비자나무는 어디 있는 거지, 궁금증이 더해갈 때 안내문이 있다. '비자나무는 주목나무'라고도 하고, 답을 찾았다. 비자나무는 단단하고 짧은 잎이 촘촘히 달린 침엽수, 내가 알고 있던 주목나무였다. 순간 호기심이 말끔히 사라졌다. 청량한 숲 냄새가 무엇 때문인지 대번에 알게 된다.
어제 내린 눈이 숲 곳곳에 남았다. 산책로는 부분부분 눈이 녹아 질퍽거렸으나 그 또한 싫지가 않았다. 발길이 닿지 않은 숲에는 녹지 않은 눈이 갈잎 위에 소복이 남아있었다. 눈이 귀한 곳에서 와서인지 잔설이라도 반갑다. 저절로 깊은숨이 들이켜진다. 기분 좋은 설렘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이거나 친구들과 함께 온 관광객으로 보이는 산책처럼 운동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숲 가운데쯤에 새 천년 비자나무를 만났다. 수령이 80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영화 아바타에서 본 영혼의 나무를 닮았다. 주변에 있는 비자나무도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 뻘 나무들뿐이다. 모두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서 하늘을 받치고 있다. 열 개도 넘는 가지들은 제각기가 모두 아름드리 고목이다. 가지에는 푸른 이끼들이 벌어진 껍질 사이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괜히 목소리도 소근 거리게 된다. 입에서 나온 입김이 숲을 헤칠까 걱정마저 든다.
숲 사이 산책로를 만들면서 잘려나간 나무들을 생각한다. 그나마 산책로를 구획 지어 경계로 삼았으니 저 멀리 숲에 이끼들과 겨울을 잊고 자라난 홍지네 고사리가 초록 초록 잘랄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들에게 숲을 내어준 것을 감사하게 여긴다.
겨울인데도 제주의 숲은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땅에 고개를 기대고 피어있는 구절초의 옅은 보랏빛 꽃도 보이고 때 이르게 피어난 수선화도 보았다. 다들 걸어서만 보이는 것들이다. 비자림 숲에서
엉클어진 마음을 손수건을 접듯이 손바닥으로 꼭꼭 눌러본다. 머리도 홀가분하니 가볍다.
갈수록 커다란 나무들의 품이 좋고 따뜻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