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끝난 후 남편은 변호사를 믿을 수 없다며 엄청난 양의 변호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남편이필요한 자료를 말해주면 나머지 팀원에게 부탁해서 받는 일이 반복됐다.
보통 접견 신청을 하고 면회하기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10분을 보기 위해 한 시간을 넘게 달려와 두 시간을 또 기다려야 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멍하니 있거나 눈물을 찍어대며 기다렸다. 나처럼 면회 온 여자들 중 몇몇은 아무렇게나 걸친 옷차림으로 벌건 얼굴에 술냄새를 풍기며 팔자타령을 했다. 나는 일부러 면회 가는 날은 깔끔하게 차려입고 갔다. 왠지 그래야 그들과는 다른 세상에 나와 내 남편이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무사 1차 시험 원서 접수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갑자기 둘 다 백수가 된 후 난 줄곧 노무사 시험 준비를 했다. 하루에 꼬박 대여섯 시간씩 책상에 붙어 앉아 책과 씨름했다. 집안에 팽팽하게 감돌던 긴장감을 공부하는 데 쓰고 나면 마음의 불안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누그러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30대 중반에 백수가 된 부부가 싸움밖에 더 하겠는가?
시험 두 달을 앞두고 남편이 구속되는 바람에 그해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마음이 올라왔고 원망도 쌓여갔다. 차라리 시험이라도 보는 게 나중에라도 원망이 덜 하겠다 싶어 원서를 접수했다.
그 후 면회를 갈 때는 접견을 기다리며 문제집을 풀었다. 시간이 금방 갔고 마음도 편했다. 잠시라도 악몽 같은 시간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을 걷다 온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2차 재판이 끝났다.
이제 남은 건 판결뿐이었다.
판결이 있기 전 날 꿈을 꾸었다.
남편이 알 수 없는 어느 곳에서 길게 늘어선 사람들 틈에 서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서있는 남편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멀리서 볼 때는 깔끔하게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가까이에서 본 남편의 발이 맨발이었다. 신발도 신지 않고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밟고 있었다.
꿈에서 깬 후 무죄 판결은 힘들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마도 벌금형이겠구나 싶었다.
예상대로 벌금형이 나왔다.
남편이 집에 돌아온 후 열흘쯤 뒤에 1차 시험을 봤다.
합격하기 위해 보는 시험이 아닌데도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내심으론 해볼 만하다 생각했나 보다.
평소 어려워하던 경제학을 빼곤 문제가 평이했다. 어쩌면 합격할 수도 있을 거란 욕심이 생겼다.
욕심이 현실이 되었다.
2차는 전 과목 논술 시험으로 독학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대개 자격증 시험은 1차 합격자에게 다음 해 1차 시험을 면제해 준다. 당연히 다음 해 2차를 노려야 했지만 시험 유형이라도 봐둘까 싶어 2차에 응시했다.
하늘이 돕는지 그해 처음으로 2차 시험 관련 논술집이 나왔다. 학원에 갈 형편도 체력도 안된 나는 그 책으로 엉성하게 2차 준비를 했다.
몇 번의 논술 문제를 써봤던 게 전부였던 난 아무런 부담도 없이 시험을 봤다. 그런데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또 문제가 쉬웠다. 나만 그런가 싶어 둘러보니 내 옆에 청년은 손도 못 대고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오후까지 이어진 시험이 끝나고 나니 손가락이 다 저려왔다.
시험 발표가 있기 며칠 전에도 꿈을 꾸었다.
바닷가를 낀 산길을 걷고 있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닷물이 빠져나가면서 생긴 물웅덩이 속에 물고기들이 팔딱거리고 있었다.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바로 옆 웅덩이에 물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바닷물이 거의 말라버린 웅덩이에서 물고기 몇 마리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곧 죽겠구나 싶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갑자기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다른 물고기들이 있는 웅덩이로 들어가더니 기운차게 팔딱거렸다.
그해에 내가 2차 시험에 합격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머리가 팡팡 돌아가는 20대 청년들도 보통은 고시원에서 3년을 썩어야 붙을 수 있는 시험이었다. 나도 그해에 합격하려고 본시험이 아니었다.
하지만 꿈은 분명 합격을 알려주는 꿈이었다.
이럴 경우 대부분은 꿈 얘기를 하면 허무맹랑한 소리로 여긴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너무 간절히 원하다 보니 그런 꿈을 꾸는 거라고 가볍게 웃어넘겼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믿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얽히고설켜 필연이라는 운명의 그물을 짠다. 그 운명의 그물이 당신을 덮치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당신도 나처럼 겸허히 믿게 될 것이다. 마당발인 運이 개입하지 않는 일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영특한 예지몽(?)대로 2차에 합격해 그해 겨울에 노무사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사연 많은 나의 노무사 자격증은 지금 우리 집 장롱에서 20년째 잠자고 있다.
사람처럼 직업도 인연이 있어야 오래 하는 법이다.
자격증이 잠자고 있는 건 아깝지 않은데 암 수술로 사라진 내 예지몽 능력(?)은 지금 생각해도 아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