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한 여행자 Oct 21. 2024

07. 각자에게는 인생의 숙제가 있다

벌금형으로 끝날 거라던 말과는 달리 남편은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간 날 구속 됐다. 변호사조차 예상치 못한 일에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외환 위기로 국가 부도설이 돌던 때 남편은 몇 번 9시 뉴스에서 환율 전망 인터뷰를 했다. 한평생 순박하게 농사만 지으며 산 시부모는 아들의 tv 출연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그러니 아들이 대기 발령을 받은 것도 모르고 있던  시부모의 충격이 어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끝까지 시부모 모르게 넘어가려던 일이 아래 동서가 얘기하는 바람에 집안일이 돼버렸다.


얼마 뒤 남편은 의왕 구치소로 이감됐다.

첫 면회를 간 날은 하필이면 내 생일이었다.

접견 신청을 하고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남편을 볼 수 있었다.

구멍이 뽕뽕 뚫린 유리창 너머로 퍼런 죄수복을 입고 수염도 깍지 않은 초췌한 모습으로 남편이 앉아 있었다. 간신히 버티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왠지 그래선 안될 것 같았다.


" 당신은 뭘 입어도 잘 어울리네. 음.. 나쁘지 않아 하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실없는 농담을 했다. 이후 무슨 말인가를 더 했을 텐데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기억에 없는 걸로 봐서 밥 잘 먹고 있어라 정도의 안부였을 것이다.

면회를 끝내고 나오니 교도관이 남편이 들어올 때 입었던 옷과 신발, 안경 같은 소지품을 건넸다.

아무렇게나 구겨진 옷가지와 신발을 보니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우리 인생도 남편의 옷가지처럼 마구 구겨져 전문가의 솜씨로도 회생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구치소에 내 남편이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평범한 준법정신을 가진 그냥 보통 시민이다. 둘 다 간댕이가 작아 나라에서 하지 말라는 건 굳이 하지 않는, 금 모으기 운동에 애들 돌반지도 내놓는 순진한 시민이다. 그런데 어쩌다 고지식하고 간댕이도 작은 남편이 그런 거래를 했을까?

시작은 몇 년 전 주식으로 날려 먹은 돈 때문이었다. 그 돈을 만회하기 위해 찝찝했지만 '관행'이란 말로 그 찝찝함을 덮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결국은 또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돈, 돈 거리는 엄마가 지긋지긋해 도망쳤는데 하필이면 돈 사고로 구치소에 들어앉은 남편이라니!


사주를 보다 보면 각자에게는 인생의 숙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싫든 좋든 살아가면서 반드시 제때에 풀어야만 하는 숙제. 어쩌면 우리는 숙제를 끝내야만 달콤한 휴식을 허락하는 엄격한 규율을 자랑하는 학교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배우자라는 숙제가 주어지고 누군가에게는 자식이라는 숙제를 남긴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가난이라는 숙제가 또 어떤 이에게는 건강이라는 난이도 높은 숙제까지 주어진다.

이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무엇일까?

당연히 자기가 들고 있는 숙제다. 남의 떡은 커 보이고 남의 숙제는 쉬워 보이는 법이다.


내 경우엔 바로 '그놈의 돈'이 숙제로 주어진 게 분명했다.

물귀신처럼 따라다니며 문제를 흘리고 다니는 바로 '그놈의 돈'!

살면서 한 번도 부자를 꿈꾼 적이 없었다. 돈 걱정 없이 맘 편히 살길 바랬지만 그게 부자가 되고 싶단 뜻은 아니었다. 남들처럼 열심히 일해서 한 푼 두 푼 모아 언젠가 내 집 마련을 하는 게 내가 꾼 꿈의 전부다.

그런데 왜 하필 그런 내게 끊임없이 돈 문제가 일어나는가?

돈 욕심을 부려 본 적이 없는 내가 왜 돈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숙제는 제 때 사랑받지 못한 아이처럼 고집스럽고 집요한 구석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 뒤 이틀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면회를 간 날에는 돌아오기 전에 편지를 써서 넣었는데 편지는 면회 다음날에 전달됐다. 하루는 면회로 하루는 편지로 만나는 날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아빠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큰 아이는 눈치가 빠르고 예민한지라 아빠가 없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할 수 없이 멀리 출장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아이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아이의 불안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