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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한 여행자 Oct 17. 2024

05. 이혼은 아무나 하나

전생의 빚

맞벌이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도록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데려간 적이 없는 남편이 갈수록 괘씸했다.

먼저 싸움을 거는 법이 없던 나였지만 그대로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침 운동할 시간은 있고 애들을 데려다줄 시간은 없냐고 따졌다. 진을 뺀 싸움 끝에 남편이 작은 아이를 데려가기로 떨떠름한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아침마다 '다음에'를 연발하며 비겁하게 가버렸다.


그날은 아침부터 여름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핑계 삼아 내키지 않아 하는 남편에게 반 강제로 둘째를 안겨 보냈다.

남편이 아이를 안고 나간 지 5분이 채 안된 것 같았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남편은 아주 잠깐 나를 노려보더니 악을 쓰고 울어대는 둘째를 현관문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어린이집에 데려간 적이 없는 아빠가 엄마도 없이 자기를 안고 가니 겁에 질린 아이가 울어댔으리라.


'쾅'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아이는 자지러지게 놀라 그 자리에서 오줌을 쌌다.

아이를 안아 간신히 진정을 시켰지만 내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일들이 둥둥 떠다니는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이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머리가 멈춰도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인다는 걸 그때 알았다. 덜덜 떨리는 가슴으로 빗속을 뚫고 간신히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근했다.


겨우 사무실에 도착해 한숨 돌리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편이란 사람이 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나는 또 무슨 짓을 한 건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큰 아이는 내 눈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한테 나까지 소릴 질렀다.

"빨리 가서 옷입어어어엇!"


어린 가슴에 얼마나 놀랐을까? 어른인 나도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랐는데 겨우 일곱 살인 큰 아이는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작은 새처럼 떨고 있는 아이에게 나마저 소릴 지르고 아무런 보살핌 없이 어린이집에 맡기다니..

안쓰러움과 자책감이 몰려왔다.


서둘러 반차를 내고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내게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자 왈칵 눈물이 났다.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갔다. 거짓말처럼 아침 장대비는 멈춰 있었고 놀이터에는 우리 아이들 뿐이었다. 낮에 엄마가 데리러 온 게 마냥 신났는지 아이들은 깔깔대며 술래잡기 놀이를 했다. 그런 아이들이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안쓰런 마음에 또 눈물이 났다. 아무런 내색도 못하고 놀고 있는 아이들이 더 가슴이 아팠다.

좋아하는 반찬을 해서 이른 저녁을 먹이고는 일찌감치 두 아이를 재웠다.


그때까지 전화 한 통 없던 남편을 기다리며 떨리는 손으로 이혼 서류를 써 내려갔다.

주식으로 돈을 날려먹고 빚을 진건 참을 수 있어도 내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한 아빠는 용서할 수 없었다.

비 맞은 어린 새처럼 떨던 아이들의 가슴을 안아주며 이미 난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늦은 남편은 미안한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자기가 그렇게 가버리고 나서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걱정됐다면 전화라도 한통 했을 것이다.

아니면 퇴근하자마자 아이들 안부부터 묻기라도 했을 텐데 자고 있는 아이들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남편은 되레 뭘 하느라 꾸물거려서 자기가 지각하게 만들었냐며 철없는 애처럼 투덜거렸다.


남편과의 한판을 벼르고 있던 나는 그 철없음에 맥이 풀렸다. 마음 언저리에 매달려있던 망설임과 미련이 끈 떨어진 연처럼 꼬리를 흔들며 사라져 갔다.

부들부들 떨리던 분한 마음도 기이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남편에게 이혼 서류를 건넸다.


하지만 난 그때 이혼하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깟' 돈 때문이었다. 내 월급으로는 생활비조차 빠듯했고 주식으로 탕진한 탓에 분할할 재산이 전혀 없었다. 살고 있던 집 전세금은 회사에서 나온 무이자 전세대출이었다.

'그깟' 돈이 자연스레 '그놈'의 돈으로 내 혓바닥에 자리 잡았다.


여자 팔자를 볼 때는 배우자궁(宮)과 관성(官星)의 희기(希忌)를 먼저 본다. 관성은 여자에게 있어 남자 또는 남편을 뜻하는 글자다. 배우자 궁이 깨지진 않았는지 관성이 다른 여자와 합(合)해 가지는 않는지를 주로 살핀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통념이 남아서 그런 건 아니다. 남자 팔자를 볼 때도 배우자 자리와 처(妻)나 여자를 뜻하는 재성(財星)을 먼저 본다. 그만큼 팔자에서 배우자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결혼을 다른 말로 팔자 고친다고 하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의 명리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부부는 전생의 빚이 있어 만난 거라 하셨다. 한쪽이 빚을 받거나 갚으러 온 사이이니 대부분의 부부 사이가 나쁜 건 당연하다는 거다.

빚을 다 갚기 전에 이혼하면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쎄한 악담(?)까지 곁들이면서.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모든 인간은 정신의 성숙도가 다르다. 부부도 예외는 아니다.

부부 중 한 명이 미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라면 좀 더 성숙한 한 명이 전생 채무자일 가능성이 높다.

전생 채무자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만난 채권자의 어리석음과 미숙함을 참고 견뎌야 한다.

남편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으로 보아 전생의 채무자는 아무래도 나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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