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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한 여행자 Oct 16. 2024

04. 운이 부리는 조화

돈과의 악연

결혼 7년 만에 재취업을 했다.

애들이 조금 더 자란 후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결혼 후 남편은 월급을 내게 맡기려 했지만 나는 한사코 남편에게 미루었다.

돈 관리를 할 자신이 없었고 은행원인 남편이 더 잘할 거라 믿었다.


돈으로 인한 상처가 깊었던 나는 돈 얘기가 민망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남편이 얼마를 쓰고 얼마를 저축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가끔씩 남편은 통장을 보여주며 우리 집 재정 상태를 알려주곤 했다. 묻지 않아도 설명을 해주니 더 믿음이 갔고 고맙기까지 했다.


행복이란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란 말이 떠오른다.

'행복의 기원'이란 책 어느 한 챕터로 기억하는데 이 부분을 읽고 무릎을 탁 쳤던 기억이 난다.

달콤하지만 금방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에 행복을 비유한 통찰력 있는 재치가 놀랍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행복을 필요로 한다는 말에도 선뜻 수긍이 간다.


행복이 번식을 위한 것이라면 생존을 위해선 부정적인 감정이 필요하다.

행복에 취한 사냥꾼은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을 테고 두려움과 의심이 없는 사냥꾼은 포식자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인간이 부정적인 이슈더 민감한 반응을 하는 건 생존을 위한 당연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유독 흉운 凶運에 강한 반응을 보인다.

특히 나쁜 재운(財運)에는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사업을 하겠다고 설치거나 관심도 없던 주식에 손대며 워렌버핏을 꿈꾼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돈이 모두 내 돈처럼 보이고 손만 뻗으면 금방이라도 부자가 될 것처럼 설렌다.

남자의 경우엔 평소 반듯한 사람도 한순간의 유혹에 빠져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나도 재운이 들어올 때 얌전하던 엉덩이가 들썩대면서 부동산을 들락거렸던 때가 있었다. 운에서 재운이 들어와 강하게 흔들어 댈 때는 웬만한 마음수양으로는 버티기 힘들다. 운이 마음먹고 부리는 조화를 한낱 인간이 어찌 버티겠는가?

아마 남편도 그랬을 것이다. 재성이 꼬리를 살살 흔들며 나 잡아봐라 하는 운에 일을 저지 걸 보니 말이다.


뉴스에선 이름도 낯선 IMF란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던 때였다.

그 무렵 어느 날인가부터 남편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한숨을 쉬어댔다. 베개에 머리가 닿기 무섭게 잠들던 사람이 거의 한 달간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이상해서 물어보니 그동안 모은 돈으로 주식을 했다가 몽땅 날렸단다. 구경도 못했던 우리 집 전재산 사천만 원을 날려먹고 차마 말을 할 수 없어 끙끙댔던 것이다.


웃긴 건 그 말을 들은 내 반응이었다.

악다구니를 쓰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대신 이상할 정도로 태연하게 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과 '그깟' 돈 때문에 사람을 민망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뒤섞였다. 그리고 그만큼 마음고생을 했으니 남편이 다시 주식을 하지는 않을 거라 진심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건 순진한 착각이었다.

처음 돈을 날렸을 때 일부러라도 울고불고 난리를 치거나 사네 안 사네를 했어야 했다.

전 재산을 날려먹은 대형 사고에도 쿨했던 내가 만만 했던 걸까?

그 뒤에도 남편은 나 몰래 계속 주식을 했고 일관성 있게 돈을 날렸다. 제 딴에는 잃어버린 돈을 만회하려 했을 테지만 나중에는 동생들에게까지  돈을 빌렸다. 그조차도 일이 터지고야 알았으니 반은 내 책임이긴 했다.


이쯤 되면 경제권을 찾아올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돈 때문에 악다구니를 쓰거나 싸우지도 않았다.

착하거나 정말로 쿨해서가 아니라 돈 때문에 싸우는 건 정말이지 피하고 싶었다. 민망하게  싸우느니 차라리 내가 벌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난 절대 내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않겠다 수없이 다짐했다.

'그깟' 돈 때문에 자식의 가슴에 시퍼런 멍자국을 남기는 그런 엄마는 되지 않겠다고.

엄마의 이기심이 의존이 낳은 불안 때문이란 걸 알게 된 후 난 부단히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정부 조직에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나의 고달픈 워킹맘의 생활이 시작됐다.

아침마다 아이들과 함께 출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아이들 밥만큼은 먹여야 했기에 아침준비하랴 아이들 챙기랴 어린이집 데려다 주랴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남편은 아침 운동은 빼먹지 않았고 나 보고도 운동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비가 오든 말든 차려준 밥을 꼭꼭 씹어먹고는 '다녀올게'를 외치며 상큼하게 출근했다.

차도 없고 운전도 못하던 나는 하나는 포대기를 둘러업고 하나는 걸려서 어린이집에 맡기는 일상이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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