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이중적이었다
졸업즈음의 나는 매우 이중적이었다
엄마를 떠나 독립하기를 간절하게 원하면서도 정작 독립을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대학원에 진학해 심리 상담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일피일 취업 준비를 미루며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즈음에 처음으로 연애란 걸 하게 됐다. 같은 과 애들보다 나이가 많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복학생 선배들과 어울렸다. 그는 복학생 선배들 중 하나였다. 몇 번의 썸이 연애 경험의 전부였던 나는 곧장 돌직구를 던지며 다가오는 선배가 싫지 않았다. 지나치게 진지해서 재미하곤 거리가 멀었지만 성실함만은 인정할 만했다.
익숙함에 의지해 연애를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녀 사이로 발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내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결혼이 진행됐다. 그 과정 중에 석연치 않은 감정들이 올라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마음속에선 멈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 신호도 무시했다.
어느 휴일 날 그가 따로 약속이 있다길래 난 친구를 만나 그날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는 바람에 친구는 가버렸고 난 친구에게 너무 미안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는데 자기는 다시 가봐야 한다며 얼굴만 잠깐 보려고 왔다고 했다.
친구 놈이 싫다는데도 한사코 소개팅 자리를 잡아놔서 안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때 우린 결혼 날짜까지 잡고 양가 상견례를 앞두고 있었다. 그 상황에선 누가 들어도 농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화를 내자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군다며 오히려 화를 냈다. 하도 당당하게 화를 내니 순간 헷갈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순진함을 넘어 멍청하기까지 했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떨리는 가슴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구는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라도 그 정도 바보는 아니었다.
한동안 난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어쩌면 그대로 끝내고도 싶었다. 마음 한편에선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때의 난 단호하지 못했고 다시 그와 찜찜한 화해를 했다.
그 당시엔 결혼이 깨지고 나서의 후폭풍이 두려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그럴듯하게 집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회피에는 자존감이란 대가가 따른 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 자존감과 運은 비례한다
회피는 항상 더 큰 문제를 안고 되돌아온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란 드라마를 보았다. 인적이 드문 깊은 숲 속에서 펜션을 운영 중이던 주인공은 아이와 함께 묵었던 어느 여자 손님의 방에서 살인의 흔적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빚어질 구설수가 두려웠던 주인공은 끝내 외면하고 만다. LP판에 묻어있던 핏자국, 락스 냄새가 진동하던 화장실, 무거운 캐리어를 차 트렁크에 싣고 있는 블랙박스 영상이 있었지만 주인공 남자는 중얼거린다. '아닐 거야 내가 너무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눈앞에 닥칠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는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회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자신을 속인 대가로 그토록 지키고 싶던 펜션은 망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딸은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단 말이 있다.
우리는 왜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미루는가?
눈앞에 닥친 당장의 고통과 불이익을 감내하기 싫어서다. 그리고 그 고통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다른 선택지를 찾아내고는 최선의 선택을 했노라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 모두를 속이고 하늘마저 속일 순 있어도 자신만은 속일 수 없다. 우리 내면에는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비춰주는 모니터가 있어서 우리가 알아차리고 인정할 때까지 재방송을 틀어대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자신이 하는 결정이 선택인지 회피인지 자신만은 안다.
회피는 생각보다 위험하다.
회피는 우리의 자존감뿐만 아니라 運도 갉아먹는다.
손상된 자존감이 運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나쁜 運에 자존감이 낮아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반대로 어떤 어려움에도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높은 자존감이다.
모르긴 해도 그들은 특유의 기운으로 지나가거나 다가오는 運을 낚아챘을 것이다.
자존감은 에너지다.
낮은 자존감으로는 코앞에 있는 幸運도 잡을 수 없다.
자존감은 단단한 내면의 원천(源泉)이다.
바위 같은 내면의 힘은 높은 자존감에서 나온다.
내면의 힘은 당신이 흉운(凶運)을 만났을 때 버팀목이 되고 행운을 알아보는 혜안(慧眼)을 선물한다.
그러니 당신의 자존감이 안녕한지 항상 살피시라.
그것이 당신의 運이 좋아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