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처음엔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번 나빠진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게다가 노무사란 직업에 정나미가 떨어진 상태가 생각보다 오래갔다.
전문직 자격증을 따는 모든 사람의 최종 목표는 개업이다. 실업급여 업무를 하면서 월급쟁이가얼마나 파리 목숨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진입 장벽이 높아 아무나 할 수 없는 전문직 사업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답에는 미처 생각도 못한 문제가 있었다.
그 당시엔 개업 노무사로 먹고살기 위해선 공무원을 상대로 친목을 가장한 '영업'을 해야 했다. 대표 노무사는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업무의 연장이라며 참석을 강요했다. 술을 따르라고는 안 했지만 2차로 끌려간 노래방에선 브루스를 추라고 등을 떠밀었다. 끝까지 버티는 나를 보고 나이 지긋한 감독관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 ㅇ노무사! 그렇게 해서 어떻게 노무사로 먹고 살라그래?"
명절 때가 되면 '떡값'을 돌리고 공무원들이 워크숍이라도 가면 필요한 물품을 차 트렁크에 채워야 했다.
그나마 함께 술이라도 마시며 친목을 다져놓은 공무원은 양반이었다. 핸섬하고 반듯하게 생긴 외모로 떡값이 아니라 몇 프로를 가져오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놈도 있었다. 지금보다 더 순진했던 난 진심 농담인 줄 알았다가 정색을 하는 그놈 얼굴을 보고서야 사태 파악을 했다.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노무사로 먹고살긴 틀렸단 깨달음(?)이 왔다
술냄새도 싫어하던 나는 남편 옥바라지 때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집에서는 늦게 온다고 아우성이었고 밖에서는 일찍 간다고 난리였다.
몇 달이 지나자 수전증 환자처럼 손이 떨리더니 수시로 어지러웠다. 노무사 준비를 하다 생긴 요통은 점점 심해져 몇 걸음 걷기조차 힘들어졌다. 허리가 아파 본 사람은 요통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 것이다.
어느 날, 잠에서 깨자마자 침대가 빙빙 돌았다. 한 달 가까이 쉬었지만 어지럼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대표 노무사는 휴직을 권하며 반년동안 퇴직 처리를 안 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까지 자격증 준비를 하던 남편은 내가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취업을 했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경제권이 내게 넘어왔다.
처음엔 정기 예금과 적금도 구분 못했지만 여러 책을 보면서 재테크에 눈을 떴다. 금리를 비교해 가며 적금을 들고 목돈이 되면 다시 금리 높은 정기 예금에 묶어 놓았다. 생각지도 않게 들어온 목돈도 친절한 직원 덕분에 복리로 굴릴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6%대 금리가 가능했기 때문에 은행은 가장 안전한 재테크 기관이었다. 게다가 분양가보다 싸게 샀던 아파트는 옆동네의 재개발로 두 배가 넘게 뛰었다. 동네 여자들이 둘셋만 모여도 아파트 값 얘기로 시끄러웠다.
그 무렵 남편은 다니는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갈등했다.
전에 하던 일과 전혀 관계가 없는 데다 규모가 작은 회사랄 것도 없는 직장이니 당연하긴 했다.
남편과 같은 경우를 상담원 시절 수없이 봤다.
민원인 중에 대기업 출신의 외국어 능력까지 겸한 40대 가장이 있었다.
처음엔 의욕적으로 구직 활동을 했고 어렵지 않게 중소기업에 재취업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퇴사를 하고는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러 왔다. 그는 이 짓을 반복했고 퇴사 후 우연히 본 그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영어학원을 차리고 싶어 했다. 그때는 팔자공부를 하기 전인데도 왠지 사업은 안될 것 같았다. 그 문제로 우린 잦은 언쟁을 벌였다.
그러다 우연히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게 됐다.
'집은 자산이 아니라 부채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이 한마디 말은 내게 영감(?)을 주었다.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 단지가 둘러싼 다가구 주택 단지가 있었다. 대대로 농사를 짓던 땅이 개발이 되어 건물주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 토박이였다. 보이지 않는 선이 아파트와 그들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것 같았다.
저녁 산책길에 늘어선 다가구 주택을 바라보다 문득 로버트 기요사키의 말이 생각났다.
'집에서 현금이 나오지 않는다면 집은 자산이 아니라 부채다'라고 했던 그 말.
1층 상가에서 학원을 하면 월세 부담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아파트 값은 두 배 넘게 뛰는데 주택값은 움직이지 않던 때였다.
너도 나도 아파트를 찾던 때라 아파트 값은 뛰는데 다가구 주택 값은그대로였다. 가슴을 설레며 남편에게 말했지만 남편은 코웃음을 쳤다.
"저게 얼마 짜린 줄이나 알고 하는 말이야?"
살던 집을 팔아 보증금을 끼고 대출을 만땅 받으면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미련이 남아 지금의 우리 집이 매물로 붙어 있던 집 앞 부동산에 들어갔다. 후덕해 보이는 중개사의 설명을 들으니 더 확신이 갔다.
부동산 투자에 대해 뭘 알아서 갖는 확신이 아니었다. 아파트는 집 값이 올라야만 수익이 나고 아파트 값이 오른다 해도 내 아파트만 오르는 게 아니니 옮겨 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월세가 나오는 주택은 집값이 오르지 않는다 해도 현금이 나오니 손해 볼 게 없을 거란 단순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집값까지 올라 준다면?
하지만 남편은 꿈쩍도 안 했다. 아파트가 공동명의인 데다 대출이며 집을 사는 데 필요한 전반적인 일을 남편이 해야 하는데 꿈쩍도 안 하니 내 속만 타 들어갔다.
속을 태워도 남편의 고집을 꺾을 도리가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 심정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