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꽤 흘렀지만 나에겐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듯했다. 하루가 너무 더디 갔다. 여행도 가보고 시답잖은 일도 해봤지만 영혼 없는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어느 날은 평범한 사람처럼 멀쩡하다가도 어느 날은 마음이 미친년 널뛰듯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밤이 되어 잠들 때면 그대로 영원히 잠들어 깨지 않으면 어떨까 상상했다. 아이들만 아니라면 그런 마지막도 그닥 나 빠보이지 않았다.
고3을 코앞에 둔 큰아이의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대로 어디론가 침몰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해를 며칠 남겨 둔 12월 어느 날 큰 아이는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엄마 나 인강 사도 돼.......?"
미안함이 잔뜩 묻은 아이의 물음은 어디론가 가라앉고 있던 내 마음을 잡아당겼다.
미숙한 부모로 인해 철이 일찍 든 아이였다. 남편은 다시 사업을 하겠다며 소개로 들어간 회사를 나온 상태였다.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백수이니 얼마나 애를 태우다 한 말일까 싶어 가슴이 미어져왔다.
내가 비참한 마음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을 때 아이들은 마음을 졸이며 하루를 버티고 있었단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당장 결제하라는 내 말에 아이는 눈물을 그렁거렸다.
눈물을 그렁대는 아이를 보니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과외밖에 없었다.
다행히 다시 시작한 과외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빠르게 자리 잡았다. 급한 마음에 시작한 과외는 어쩌다 보니 큰 아이가 대학을 가고 작은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한 번도 본업이라 생각한 적이 없는 과외는 내게 잘 맞는 옷처럼 편안했다. 어쩌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편안함을 넘어 나를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철없는 웃음과 장난은 잠시나마 가슴속 상처를 무디게 했다.
내게 온 아이들은 모두 순해서 수업 중에 큰 소리 한번 낼 일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온 아이가 고3이 될 때까지 다니다 보니 반(半)은 내 아이가 되어 그 집 엄마랑은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다.
코로나때 군대 간 자칭 제자는 집 앞에 말없이 달팽이 크림을 놓고 가기도 한다.
어렵기로 정평이 난 명리학을 겁도 없이 공부하게 만든 일등 공신중 한 명은 남편이었다.
월세와 내 수입으로 생활은 풍족했지만 할 일을 잃은 사십 대 가장은 바늘귀만큼이나 속이 좁아 집안을 살얼음판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무심코 뱉은 말에도 욱 하는가 하면 의논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을 비난으로 받아치곤 했다. 고슴도치처럼 잔뜩 날을 세운 남편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이었다. 전생의 채권자라 그런가 백수 주제에 어찌나 당당하시던지..
남편은 천성이 고지식하고 유머 세포가 아예 없는 사람인 데다 말수까지 없는 사람이다. 입버릇처럼 한다던 학원을 몇 달도 못하고 내빼 학부모들 볼 낯이 없게 만들었다. 공인 중개사 자격증을 땄지만 집을 사겠다고 온 사람한테는 '지금은 집 살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면서 돌려보냈다. 실적제로 들어간 중개사 사무실에서 쫓겨나는 게 당연했다.
왜 하필 그때 명리학 공부를 해 봐야겠다 생각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사주팔자란 말은 들어봤어도 명리학이 뭔지도 모르던 때였다. 처음으로 지인들을 따라갔던 부천의 한 역술원이 인연이라면 인연이랄까?
허름한 빌라 2층집, 무당처럼 보이던 역술인은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가니 담배를 꼬나물고 말했다.
" 이야 이번엔 아주 똑똑한 양반이 오셨네에에"
으응?
내가?
어딜 봐서?
아까운 내 돈 만원만 날렸구나 싶어 심드렁하니 의자에 앉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날 샜구나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 여자 역술인은 비장의 한마디를 날렸다.
" 남편이 30대 때 아주 큰 사고를 치셨구먼. 욕심부리다 밥그릇을 차셨겠어 "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만큼이나 동그래진 눈으로 그 여자가 보고 있는 종이를 바라봤다.
종이엔 알 수 없는 한자들과 무슨 이상한 표식 같은 게 있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어디에 그런 게 있느냐고 물었던 거 같다. 그 무당처럼 보이던 역술인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맘고생이 많았겠어.... 그래도 자식 복은 있으니 괜찮아. 남편 복보다 자식복이 더 좋은 거야."
그날 생면부지 무당 같은 여자 앞에서 하마터면 주책맞게 울 뻔했다. 이상한 건 나한테는 그렇게 용했던 그 역술인은 함께 간 두 명에겐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고 했다.
막 사십을 넘어서던 해에 있던 그 일이 오십이 되던 해에 느닷없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가봐야지 싶어 연락처를 찾았지만 나도 지인들도 이상하게 연락처가 없었다. 급기야 지인 중 한 명이 빌라 근처를 직접 가서 찾아봤지만 우리가 갔던 그 역술원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용하다는 역술원 몇 군데를 다녀봤지만 답답한 건 여전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검색어를 따로 친 것도 아닌 데 갑자기 유튜브에서 사주강의가 떴다. 무심코 눌러들어보니 오행의 생극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木은 火를 생하고 火는 土를 생하며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재밌었다. 그 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사주강의에 빠져 육십갑자와 오행의 생극관계, 삼합, 육충 같은 걸 마구 외웠다. 그때 나는 이유 없는 갈증으로 목이 말라있었다.
그러다 선생을 구해 제대로 배워보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그때부터 상담을 가장해 팔자선생을 찾기 시작했다. 블로그 글을 읽어보고 웬만큼 믿음이 있어서 갔는데도 '영 아니올시다'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실망한 나는 이번에도 아니면 포기해야지 하며 인터넷을 뒤적이고 있었다. 한 정갈한 블로에서 2016년 1월 명리학 기초강의 수강생 모집공고를 봤다.
그동안 올려놓은 블로그 글을 꼼꼼히 읽으며 드디어 팔자선생을 찾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먼저 내 생년월일을 보내 수강생으로 합격을 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까다로운 나의 선생님은 아무나 제자로 받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기초반에서 임상반, 임상반에서 심화반으로 올라갈 때도 '아니다' 싶은 사람에겐 연락을 하지 않으셨다.
다행히 수강생으로 합격(?)해 처음 선생님을 뵙던 날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돌아왔다. 드디어 험준한 명리산 등반에 믿을만한 길잡이를 만났구나 싶어 오랜만에 마음이 설렜다.
그 길이 얼마나 고달플지, 얼마나 긴 시간을 가야 할지 까마득히 모른 채 그저 기쁘기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달파도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하필 그때 팔자공부를 시작한 건 내 인생 '신의 한 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