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양陽이라면 여자는 음陰이다. 동물이 양이라면 식물은 음이다. 오행중 木, 火가 양의 기운이라면 金, 水는 음의 기운이다. 여름이 양기운이 가장 치열할 때라면 겨울은 음기운이 가장 살벌할 때다.
양의 기운은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움직이며 상승하고 확장하는 기운이다. 팔자에 양기운이 넘치는 사람은 여자라도 남자 같은 활동력으로 조신함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음기운은 수렴하여 응축하는 기운으로 적당하면 차분하지만 넘치면 정서장애에 취약하게 된다.
陰과 陽은 서로를 견제하지만 또한 서로를 필요로 한다.
보기에는 陽이 陰을 이기는 것 같지만 음이 없으면 양은 상승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안착하지 못하고 떠돌다 사라지게 된다. 陽이 없는 陰은 태양을 잃은 만물처럼 응축된 기운을 펼칠 수 없어 생명력을 잃게 된다.
陰과 陽은 빛과 그림자처럼 둘이면서 하나다.
온 세상이 아무리 밝아도 어딘선가 陰이 싹트고 있으며, 陰이 세력을 떨치며 온 세상을 어둠으로 몰고 갈때도 陽은 어딘가에 웅크려 재기할 기회를 노린다.
명리학 공부를 시작한 지 8개월쯤 되자 쉬운 사주는 대충 글자의 희기(喜忌)를 볼 수 있게 됐다. 나와 남편의 사주를 밤낮없이 들여다보니 적어도 사업을 할 팔잔지 아닌지는 알 것 같았다.
그때는 남편이 부동산 몇 군데를 전전하다 중개소 사무실을 차리겠다고 고집을 부린 던 때였다.
'아빠는 약자라'며 항상 아빠 편을 들던 둘째마저 반대를 하자 남편은 오밤중에 집을 나가기도 했다.
그날은 서울로 명리 공부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집이 경기도 외곽이라 서울에 가려면 일주일에 한번씩 광역버스를 타야했다. 광역버스를 타고 사당역까지 간 다음 다시 지하철을 타야 하다보니 공부를 마치고 오는 버스에선 늘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공부시간도 세시간인데다 버스를 타고 오가는 두 시간까지 더하면 나에겐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남편때문에 머리속이 복잡해서 그런지 집이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말똥말똥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버스 안 tv 모니터의 흘러가는 자막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인터넷이 없던 대학시절 알바를 구하려고 거리에 붙어있는 구인광고를 훑던 것이 버릇이 된 덕분(?)이었다.
tv모니터에선 ㅇㅇ 해양인력 양성센터에서 배 엔진 정비교육생을 모집하는 자막이 지나가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몰라도 순간 머리에 남편 사주가 떠올랐다.
집에 와서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보니 앞으로 전망도 괜찮아 보였다.
남편에게 카톡으로 자료를 보내주며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남편은 읽씹 했다.
남편의 고집을 아는 터라 글렀구나 싶었다.
그런데 마감 하루 전날 남편이 말했다.
" 당신이 명린지 뭔지 공부했으니 내가 왜 이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명리적으로 말해 봐"
" ???? 내가 공부를 하면 얼마나 했다고 그런 걸 알겠어? 근데 당신이 물과 관련된 일을 하는 건 맞는 것 같아. 당신은 인생 전반전에 쓰는 관(官)과 말년에 쓰는 관(官)이 달라. 뭔가 물과 관련된 기술을 쓰거나 그런 걸 가르치는 일과 인연이 있는 거 같으니까 해보라는 거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남편이 내가 보내 준 자료를 꼼꼼히 보더니 생각에 잠겼다. 전부터 기술을 배워야겠단 말을 종종 했던 터라 희망이 보였다. 다행히 접수 마감일에 남편은 직업 교육 신청을 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일게다. 남편의 이 선택은 갈곳을 몰라 제자리를 맴돌던 인생의 방향키가 됐다.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남편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펄떡이는 희망이 다시 온 몸을 도는 듯했다. 뭐든 열심히 하는 덕분에 강사들 눈에도 띄었다. 원서를 봐야 하는 일이 있을 때는 강사를 대신해 설명해 주니 자연스레 같은 교육생들 사이에 인기도 있는 듯했다.
교육 수료 후 강사 중 한 명의 사업장에서 무보수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 돈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경력으로 남았다. 이후 두세 번의 이직이 있긴 했지만 연봉을 높여가며 한 이직이었다. 배 엔진 관련 미국 자격증을 세 개나 취득한 데다 경력까지 쌓인 덕분이었다.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등 유럽의 마린 업체로 출장을 다니며 몇 년이 바쁘게 지나갔다.
8년이 지난 지금 남편은 자기가 교육받았던 공공기관에서 배엔진 정비교육 책임 강사로 근무 중이다.
8년전 앞날을 모르는 교육생으로 앉아있던 그 장소에서 책임강사가 되어 센터의 전반적인 일을 지휘, 감독하고 있다.
가끔은 대학에 나가 어린 학생들에게 실습을 시키기도 한다. 부산의 모 대학 교수는 남편이 쓴 책을 인용하겠다는 허락을 구한다. 남편은 은행을 나온 지 거의 20년 만에 직장다운 직장을 다니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남들 퇴직할 나이에 유능한 사냥꾼이 된 남자의 어깨는 다시 늠름해졌다. 남자의 바늘귀처럼 좁아졌던 속은 다시 넉넉해지고 거칠었던 말투는 유순해졌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우주라는 천재 작가가 쓴 시나리오 속 등장인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우주가 이미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날이 언제일지 알 수 없어도 영혼이 되어 하늘에 가게 되면 내 꼭 한번 물어 답을 들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