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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한 여행자 Nov 05. 2024

18. 팔자란 게 진짜 있을까?

사람들이 사주를 볼 때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가 직업이다. 갑자기 실직한 가장들은 물론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20대까지 사주를 볼 때 공통 관심사 중 하나가 팔자에 나타난 직업이다.

뭘 해 먹고 살 팔잔지가 궁금한 건 팔자 공부를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주 보러 온 사람을 앞에 두고 '나랏밥 드시는 분이구먼' 하면 얼마나 폼 나겠는가? '남편이 칼을 쓰는데 의사요?' 할 때 내담자의 놀라서 벌어지는 입과 흔들리는 동공은 팔자공부를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일 게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주에서 직업을 집어내기는 대단히 어렵다. 물론 팔자를 '척 보면 안다'는 분들도 있지만 그런 분들을 만나는 행운은 아직까지 내게는 없었다. 척 보면 알기에는 팔자종류가 너무 다양한 데다 관법 또한 다양해서 공부를 꽤 오래 한 일인으로서 쉬이 믿어지지도 않는 게 사실이다.

무기로 쓸만한 뚜렷한 글자가 없는 대부분의 팔자는 대운(大運)과 세운(歲運)을 조합해 요리조리 조물딱 거려야 겨우 직업이 보일까 말까 한다. 그런 팔자를 '척보고' 직업을 알 수 있다면 그 용한 역술인의 업장은  팔자공부를 하려사람들뿐만 아니라 손님들로 넘쳐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굳이 본인 입으로 '척 보면 안다'는 낯간지러운 허세를 부릴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하긴 남편이 한창 방황할 때는 '척 보면 안다'는 자칭 도사라도 만나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당신 남편은 이런 일이 인연이 있으니 동(東)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거요'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을 때가 있었다. 사방이 막힌 것 같은 막막함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조급함은 허접한 선택으로 이어진다.

명리 공부를 할 때 나의 주된 관심사도 팔자 주인공의 직업이었다. 당연히 남편뿐만 아니라 아이들 사주를 들여다보며 아이들이 뭘 해 먹고살 팔잔지를 살폈다.


어려서부터 조용했던 둘째는 확실히 아빠를 닮았다. 고집이 남달라서 스스로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꺾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피시방을 자주 드나들기에 매를 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용돈을 끊어 버리자 내 지갑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러다 애 잡겠다 싶어 채찍을 거두고 당근을 택했다.

자신을 속이는 일은 위험하다고 타이른 뒤 피시방을 맘껏 가도록 허락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에게 피시방에 갈 때마다 피시방비도 대주겠다고 했다.


그 후 아이는 정말로 맘껏 피시방을 드나들었고 갈 때마다 의기양양하게 돈을 타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다 아이가 게임중독이 되는 건  아닌지 슬그머니 걱정이 됐다. 겉으론 무심한 척 하지만 여린 속을 지닌 아이의 약점(?)을 노려 보기로 했다.

비 오는 날을 노려 불쌍한 척 피시방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다 데려오기를 몇 번인가 반복했다. 처음엔 짜증을 부리던 아이도 나중엔 무심하게 굴었다.

 나의 꼼수가 통했는지 시간이 지나자 돈을 타가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혹시 몰래 가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슬그머니 요새는 피시방에 안 가냐고 물으니 재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나중엔 그냥 용돈으로 달라고 해서 피시방은 시험 끝나는 날에나 가는 장소가 됐다.


 수능 성적이 나오던 날, 그날은 시골에서 올라온 시어머니가 시골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남편과 셋이서 밖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낮인데도 식당밖이 저녁때처럼 시커메졌다. 순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급히 시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집으로 뛰었다.


아이가 돌아오기 전에 집에 도착해 불을 밝혀야겠단 생각밖에 없었다. 논술전형으로 가기 위해선 최저등급을 맞춰야 하는데 설명할 순 없어도 뭔가 틀어졌단 예감이 들었다. 기대와 다른 성적표를 받아 들고 힘없이 집으로 향하는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듯했다.

한낮인데도 저녁처럼 어둠이 내린 집안에,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안에 그런 아이가 혼자 있게 하지 않기 위해 뛰었다. 다행히 집에 도착해 거실에 불을 막 켜고 한숨 돌리는데 현관문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삼키며 집에 들어서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엄마! 성적이 이상하게 나왔어"


아이는 약간 울먹이며 말했다. 가장 자신 있던 수학이 한 문제 차이로 원하는 등급을 비켜갔다고 했다.

나는 애써 태연하게 괜찮다고 말했다. 그래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아이는 평소답지 않게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다. 한참을 횡설수설하더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는지  양치를 하러 욕실로 갔다.


그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은 다짜고짜 아이의 성적부터 물었다. 아이가 들을까 봐 안방으로 가서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잠시 말이 없던 남편은 아이를 바꾸라고 했다.

이때만 해도 나는 당연히 남편이 아이를 위로해 주려는 줄 알았다. 이를 닦다가 아빠 전화를 건네받은 아이는 칫솔을 입에 문 체 울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나는 전화기를 뺏어 남편에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지른 뒤 끊어버렸다.


치약을 입에 문 체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나도 눈물이 났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준들 이미 늦은 걸 알고 있었다.

가장 취약했던 순간에 부모란 이름으로 행해진 질책은 아이에게 사무치는 아픔이 되었으리라. 부모가 아무리 속상한들 시험을 치른 당사자보다 가슴이  아플수 있을까?

그 후로 꽤 오랫동안 남편은 내게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다가 둘째 아이의 간청(?)으로 겨우 사람이 되었다.


그날 아이와 난 많이 울었고 많은 얘기를 했다. 아이와 주고받던 이야기가 갈 수 있는 대학과 전공학과에 이르자 아이는 뜬금없이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만화를 좋아했고 웹툰작가가 꿈이었다고 했다.

그림이라곤 연습장에 끄적거리는 것도 본 적이 없는 데 만화라니? 본 적이 없는 데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나에겐 비장의 무기인 아이의 사주가 있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만화를 그려서 먹고 살 거 같진 않았다.

아이의 고집을 알기에 말릴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빨리 도전해서 빨리 포기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 후 아이는 꼬박 대학 3년을 전공과는 무관한 만화를 그리는 데 썼다. 학원을 보내 준대도 싫다며 혼자 해부학 책을 빌려다 씨름했다. 3년쯤 되자 슬슬 생각이 많아지는 눈치였다.


두 아이 다 나를 닮았는지 살이 찐 적이 없었다. 덕분에 둘째는 저체중으로 공익 판정을 받았다. 근교 고등학교에서 공익 생활을 시작했다. 밖에서는 살갑게 구는지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직원들이 모두 아이를 예뻐했다. 그들의 입김 때문인지 간간히 그림을 그만둘까 하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평소에 큰아이와 달리 둘째 아이는 사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둘째한테 공무원이 될 팔자란 말을 은근슬쩍 흘렸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도를 아십니까' 취급을 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 직업 선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는 않는다. 얘기 한다고 들을 애들도 아니지만 그래서도 안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째는 공무원외에는 답이 없어 보였다. 대학 3년 동안 만화를 그린답시고 학점 관리를 안 한 데다가 이력서에 쓸 스펙이 단 한 개도 없었다. 근데 머리는 제 형보다 나아서 마음먹고 공부하면 성적이 쑥쑥 올랐다.


둘째는 돈을 만지작 거리는 조직과 인연이 있어 보였지만 그게 또 은행은 아닌 거 같았다. 아이를 모르는 역술인이 보면 경찰이나 검찰 계통의 직업을 말할 것 같은 구조였다. 하지만 아이 성격을 잘 아는 나는 그냥 공무원이 제격이다 싶었던 것이다.


공익을 하면서 아이는 인강으로 7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제대 일이 다가왔다. 제대 후에는 본격적으로 수험생이 되어 공부에 매진했다. 내가 둘째를 키우며 아이가 새벽까지 공부하는 걸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중, 고등학교 때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에는 잠을 푹 자야 시험을 잘 본다며 밤 10시면 잠자리에 들던 아이였다. 내 짐작엔 만화를 그리느라 몇 시간씩 앉아있던 엉덩이 힘이 공무원 공부 밑천이 된 것 같았다.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란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명언임에 틀림없다.


2021년  문서가 관(官)을 달고 오는 辛丑년에 아이는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대학 졸업을 1년 앞뒀었기 때문에 1년 유예 신청을 거쳐 지금은 세종시에 근무 중이다. 아이가 일하는 곳은 돈을 만지는 조직은 아니지만 재경부 소속이긴 하다.


정말로 아이는 공무원이 될 팔자였을까?

아니면 공무원이 될 팔자라고 은근슬쩍 흘리던 내 말에 세뇌를 당한 걸까? 

아무도 답을 모를 일이지만 가끔은 나도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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