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적천수라는 책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적천수는 명리학의 고전으로 팔자공부를 어느 정도 하게 되면 한 번쯤은 보게 되는 책이다. 특히 각 천간과 지지의 특성을 짧은 어구에 압축 표현한 천간 지지론은 까다로운 선생님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시는 부분이다.
예를 들면, 겨우내 얼어있던 땅을 뚫고 나오는 甲木의 기운을 이렇게 표현하는 식이다
갑목참천(甲木參天)
갑목은 하늘을 찌를 듯이 강직하다
탈태요화 (脫胎要火)
어린 나무가 껍질을 벗으려면 火가 필요하다
甲木일간들의 굽힐 줄 모르는 성정과 못 먹어도 go로 직진하는 성향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산천의 초목이 그렇듯 木일간으로 태어난 팔자들은 무엇보다 식상인 火를 봐야 꽃을 필수 있다. 탈태요화란 말은 이를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적천수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간지불배편이다. 간지불배(干支不背)란 천간과 지지가 서로 거스르지 않는단뜻이다. 그중에서 상하귀호정화(上下貴乎精和)란 말은 천간과 지지가 서로 사이가 좋으면 팔자가 귀해진단 뜻이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좌우귀호기협(左右貴乎協)이란 말도 나온다. 좌우귀호기협이란 말 그대로 천간과 지지뿐만 아니라 이웃한 글자와 서로 도우면 이 또한 팔자를 귀하게 만든단 뜻이다. 서로 돕는다는 말은 글자의 기운이 약할 때는 生해주고 기운이 넘칠 때는 기운을 빼내는 글자가 이웃한걸 뜻한다.
한마디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천간 지지와 그 이웃한 글자들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간지불배편을 보다가 비로소 행복의 조건에 부부관계와 인간관계의 중요성이 왜 빠지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여덟 글자 전체가 팔자주인공의 삶을 표상하듯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는 삶의 질을 결정한다.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지인들이 있다. 내 글에 등장해 어려울 때마다 나를 도와주던 바로 그 지인들이다.
나보다 모두 서너 살 어린 동생들이지만 그냥 친구처럼 지낸다. 내 팔자가 식신을 쓰는 팔자라 그런가 이상하게 나이 어린 사람들과 인연이 두텁다.
우리는 모두 학부모 영어교실에서 만난 이웃으로 곧 20년 지기가 된다. 처음에는 그저 영어를 좀 더 잘해볼까 해서 스터디 모임을 시작했는데 그게 세월이 꽤 흐르다 보니 서로 속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됐다.
아이들이 모두 초등학교 다닐 때 만났는데 벌써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곧 서른을 앞두고 있다.
나에게 이 지인들은 하늘이 보내준 귀인들이다. 몸은 아프고 남편은 철딱서니 없이 굴때 이 귀인들이 없었다면 버티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시 과외를 시작했을 때 지인들이 학생들을 소개해준 덕에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지인 중 한 명은 늘 입맛 없어하는 나를 위해 반찬 가게 아줌마처럼 반찬을 날랐다. 소소한 밑반찬은 물론 열무김치와 알타리 김치까지 해다 문 앞에 놓고 가곤 했다. 겨울이 돌아올 때쯤엔 동치미를 담아 오며 카톡을 날린다.
"언니 동치미는 내가 평생 책임져 줄게, 걱정 말고 많이 먹고 건강하기만 해."
낚시가 취미인 그 집 남편이 잡아오는 갈치며 대구를 손질해서 해마다 문 앞에 걸어 놓기도 한다.
가장 나이 어린 지인도 반찬 솜씨가 좋아 종종 정성스레 보자기에 싼 밑반찬을 수줍게 가져다준다.
하얀색 벤츠를 끌고 다니는 또 다른 지인은 명절 때마다 선물을 들고 온다. 그 집 큰아들이 내게 영어를 배울 때 하던 걸 아이가 서른이 다 돼 가는 지금도 하는 거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잠깐 망설일 때도 지인들의 적극적인 격려로 팔자에 없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어리숙한 나를 위해 비행기표 예매부터 숙소를 정하기까지 여러 도움이 있었다.
반찬집 아줌마처럼 반찬을 나르던 지인은 열무김치 한통을 제주도로 보내왔다. 수줍은 막내도 밑반찬을 해 보내려다 냉장고가 좁다는 말에 내 남편에게 가져다줬다. 역시 먹을 복 있는 팔자는 다르다.
자식들일도 니집네집 구분이 없다.
큰 아이의 결혼식은 나만의 결혼 식이 아니었다. 햇살처럼 예쁜 며느리를 나만큼이나 예뻐해 준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 넷은 모두 눈이 빨개져서 서로를 쳐다보다 웃었다
요즘은 노안으로 영어스터디는 접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밥을 먹고 수다를 떤다. 명품과 벤츠를 좋아하는 두 지인의 수다가 끝날 때쯤엔 저마다의 고민이 오간다. 자식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해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할 나이가 되니 당연히 얘기는 자식들 얘기로 끝난다. 늘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지인들이 요즘은 내 팔자를 부러워하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일이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최인철 교수의 행복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미국 모 대학에서 행복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을 비교 분석한 내용인 걸로 기억한다. 불행한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끼리 모이고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내용이었다. 가까운 친구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할 확률이 15%로 올라간다는 내용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지금 아무리 불행해도 행복한 사람들 곁에 꼭 붙어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강의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도 한때는 팔자 좋은 내 지인들과의 만남이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비우려 해도 비교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임을 하고 오면 우울하다 못해 비참한 기분이 들 때도 간혹 있었다.
자신이 불행할 때는 행복한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에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은 그냥 사는 얘기를 하는 건데 자랑으로 들려 배알이 꼴리기도 한다. 그 집 남편이 생일 선물이나 결혼 선물로 사준 가방이나 목걸이에도 상처를 받고 돌아올 수도 있다.
가끔은 자신보다 더 불행하거나 비슷하게 불행한 사람에게 끌리기도 한다.
그곳에선 적어도 상대적 박탈감은 느끼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현명한 당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굳이 적천수의 간지불배를 모르더라도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다.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많을수록 자신이 행복하거나 앞으로 행복할 거란 확실한 증거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불행하더라도 주변의 행복한 사람들 속에 남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