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질서대로 흐르는 계절은 대략이라도 예측이 가능한데 사람의 앞 날은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렵다.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낳는다. 앞 날이 불안한 인간은 신에게 의존하고 자연의 질서를 면밀히 관찰한 어느 천재는 명리학이란 학문을 세워 불확실성에 맞섰던게다.
명리학에는 여러 관법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조후를 소홀히 하는 문파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명리학에선 조후를 '만법의 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후(調候)란 기후를 조절한단 뜻으로 쉽게 말하면 열기와 냉기를 조절하고 조열함과 음습함을 해결한다는 뜻이다.
산천의 초목부터 하늘의 새들과 땅 위의 동물과 인간까지 모든 생명체는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추울 땐 만물이 얼어붙어 생명력을 겨우 유지하고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엔 만물이 활개를 친다. 봄이면 겨울 동안 억눌렸던 陽기가 陰기를 몰아내며 세력을 떨치려 하고 가을이면 서릿발 같은 숙살지기 기운이 여름 열기에 복수한다.
엄마 뱃속을 나와 탯줄을 끊고 우렁차게 '응애' 하며 첫 숨을 토해내던 그 순간이 팔자가 정해지는 때다. 태어나 처음으로 지구의 대기와 만나는 그때를 年, 月, 日, 時로 세워 사주팔자를 만든다.
팔자 중에서도 특히 태어난 月은 계절을 나타내므로 팔자 주인공이 어떤 기후적 환경에 처했나를 본다.
동짓달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의 태양인지, 한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의 태양인지에 따라 팔자가 달라진다. 한 겨울 추위에 온기를 내뿜는 태양은 만인이 반기지만 그렇잖아도 죽을 맛인 여름에 내리쬐는 태양을 반길 이는 없다. 그러므로 똑같은 일주라도 어떤 月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月에서 파생된 운은 계절을 따라 순환한다. 겨울 태생은 봄, 여름, 가을로 순환할 수도 있고 역으로 가을, 여름, 봄으로 순환할 수도 있다. 명주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태어난 해(歲)가 양간이냐 음간이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순환하는 건 변함이 없다.
따라서 겨울 태양도 여름 태양일 때가 오고 여름 태양도 겨울 태양일 때가 온다. 초년 운이 따뜻했다면 말년운이 심난할 수 있고 반대로 초년운에 개고생을 했다면 말년 운을 기다려볼 만하다.
만약 팔자가 조후가 심하게 무너져 있는데 이를 구해줄 글자가 팔자에 없다면 어떻게 될까?
조후가 인간의 정신과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겨울 생이 팔자에 金, 水가 많고 따뜻한 온기를 품은 木, 火, 土가 없다면 지나치게 한습 한 사주가 된다. 이런 사람이 바닷가 근처에 산다거나 배우자마저 한습 한 기운이 많다면 마음이 쉽게 가라앉아 우울증에 취약해진다.
이런 팔자는 중력을 거스르며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되도록이면 활동을 많이 하고 이왕이면 햇살을 받으며 걷는 등산 같은 운동이 도움이 된다. 타고난 팔자의 기운이 음습한 건 어쩔 수 없지만 해결 방법이 없는 건 아니란 말이다.
조후가 깨진 팔자는 신체적으로도 취약한 면이 있다.
친구 소개로 영어를 배우러 내게 온 그 아이는 고3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는 팔자공부를 한지 꽤됐을 때인데 자기 사주를 봐 달라고 몇 번이나 졸랐다. 시험이 끝난 후 재미 삼아 본 그 아이 사주를 보자 걱정이 앞섰다. 金일간으로 태어난 팔자가 지지가 불(火) 판이었다. 금방이라도 한 여름 작렬하는 태양이 불덩이 위에 앉아 있는 쇠덩이를 녹여버릴 것 같았다. 이런 팔자가 火기운이 충천한 한낮에 태어났다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다행히 金기운이 한창인 酉시에 태어나 요절의 화를 면한 것으로 보였다. 金일간이 팔자에 火기운이 지나치면 폐와 뼈가 약해 심하면 백혈병에 걸릴 수도 있다. 호흡기 질환에 취약한 건 물론 골절 사고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 어릴 때 병원을 자주 갔겠는데? 뼈가 약해서 고생했겠어"
" 어? 맞아요. 축구를 좋아했는데 다른 애들은 멀쩡한 데 저만 발목이 나가서 맨날 기브스하고 살았어요. 와 신기하다 그런 게 다 나와요?"
으쓱해진 나는 폼을 재며 한 마디 더 했다.
" 너 바다 좋아하지? 음식은 회 이런 거 좋아하고? 그런 거 많이 먹으면 특히 너한테는 건강에 좋을 거야."
" 어? 나 진짜 바다 좋아하는 데. 친척집이 바닷가에 있는데 거기만 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기운도 나는 거 같고.."
그 일이 있은 후 고3을 맞았는데 그 아이 아빠는 두 아들을 위해 한의원에서 진맥 후 보약을 지어 주었다. 그 보약을 먹기 시작한 뒤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이가 자꾸 어지럽다고 했다. 체했나 싶어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그건 아닌 거 같았다. 갑자기 그 아이 아빠가 지어 준 보약 생각이 나서 물었다.
"언제부터 어지러운 거 같아? 혹시 한약 먹고 나서 그러지 않았어?"
"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거 같기도 해요."
보통 보약에는 인삼이나 녹용 같은 양기를 보충하는 약재를 쓴다. 가뜩이나 양기가 넘치는 팔자에게 양기를 보충하는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에 가깝다. 우리 몸은 수승화강(水丞火降) 일 때 가장 온전한 건강상태에 이르게 된다. 수승화강(水丞火降)이란 水기운은 위로 올리고 火기운은 아래로 끌어내려 온몸에 피를 돌게하는 상태로 한의학의 기본 원리 중 하나다. 陽기가 지나치게 되면 수승화강의 균형이 깨지게 되어 음허화동(陰虛火動)의 상태가 된다. 한마디로 陰기운이 火기운을 아래로 끌어내릴 수 없어 머리를 어지럽게 하거나 잠들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한약 때문인 거 같아 일단 약을 먹지 말아 보라고 했지만 동생은 멀쩡하다며 미심쩍어했다. 아이는 집에 돌아가 그날도 보약을 먹었다고 했다. 그다음 날 아이는 씻으러 나가다 잠깐 정신을 잃고 기절을 했다. 그 뒤 아이는 내 말이 생각 나 한약을 끊었고 몸이 다시 회복되어 공부하러 왔다.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조후가 깨진 팔자는 망한 팔자라 구제 불능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우리 평범한 인생들의 팔자는 다 어딘가 부족하거나 과하게 넘친다. 내 팔자에 조후를 해결해 줄 글자가 없다면 가까운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면 된다.
한습 한 기운으로 치우친 팔자는 조열 한 팔자를 만나 움츠렸던 기운에 온기가 돌게 하고, 조열 한 기운에 점령당한 팔자는 축축한 기운을 만나 떠돌던 양기를 가라앉혀 차분해질 수 있다.
서로 부족한 기운을 보충하거나 넘치는 기운을 빼내기 위해 우리는 타인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계절이 순환함에 따라 팔자의 기운도 영향을 받고 오행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과 마음도 영향을 받는다. 여름에 팔팔했다면 겨울에 시들고 겨울에 한 끗발 날렸다면 여름엔 맥을 못 춘다. 이 세상에 변화지 않고 그대로인 만물은 없으니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한다. 그런 면에선 어쩌면 인생은 공평한지도 모르겠다.
지금 인생의 절정기에 놓인 사람은 지금을 즐기되 겸손한 마음으로 내리막 길을 염두에 둬야 한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아무리 높은 권세도 10년을 가지 못하며, 열흘 붉은 꽃은 없다.
陽이 치열하면 반드시 陰이 싹트는 법이다.
반대로 인생의 바닥도 모자라 땅굴을 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은 버텨내야 한다. 버텨내야 기회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