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계묘(癸卯)년은 하도 경황이 없어 봄의 풍성하던 벚꽃도 가을의 우아한 나뭇잎들도 기억에 없다.
작년 설이 지나고 얼마 안돼 시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시아버지가 읍내 병원에 입원해서 이것저것 검사를 받을 거라 하셨다. 경자년인 2020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시아버지는 여러 가지 병이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된지도 모르는 통풍과 4, 5년 전에 시작된 파킨슨 병에 백내장 수술 부작용으로 의심되는 안과질환, 구안와사로 얼굴의 균형까지 무너져 있었다. 그래도 꾸준하게 게이트볼을 치면서 생활하셨는데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 입원을 하셨다는 거다.
예감이 안 좋았다. 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여든을 훌쩍 넘긴 데다 기존 질병이 몇 가지나 된다. 결코 반갑지 않은 대운에다 계묘년은 천간 지지가 꼬이는 운이라 더 흉해 보인다.
아무래도 그 해를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검사결과 대장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이 나왔다. 검사 결과가 나오던 날, 우리 부부를 비롯해 나머지 형제들이 모두 내려왔다. 시어머니를 비롯해 자식들이 방을 가득 메운 채 담당의의 설명을 들었다. 연세를 고려하면 수술을 안 해야 맞지만 대장을 막고 있어 그대로 놔두면 장이 막혀 변을 볼 수 없게 된다고 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시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병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편과 나는 고민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하나?
아무 일도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야 하나?
하지만 그건 모두 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놀랍게도 시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분명히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걸 아셨는데도 우리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않으시고 묻지도 않으시면서 애꿎은 시어머니께 짜증을 부렸다. 시아버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시아버지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남은 삶을 정리할 시간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묻지를 않는데 말씀드릴 순 없었다. 담당의를 만나 검사결과를 들을 때보다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결국 시아버지는 국립 암센터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시골로 내려가 시어머니와 함께 생활하시다 그해 가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들과 며느리 손주들과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어느 자식에게도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동안 고마웠노라 미안했노라 말하면 당신의 죽음이 현실이 될까 두려웠을까?
시아버지보다 몇 년 앞서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요양원을 전전하다 아흔을 넘기고 돌아가셨다.
살아생전에는 아버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일 보고 싶다며 울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부를 땐 당신을 데려가라고는 안 했다. 젊어서는 매일 죽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자 삶에 대한 무서운 집착을 보였다. 앞날이 창창한 딸을 앞에 두고 전쟁이나 났으면 좋겠단 악담을 하던 사람이 이제는 죽는 게 무섭다고 했다.
그렇게 깔끔을 떨던 양반이, 입이 짧아 아무 음식이나 먹지 않던 사람이 생의 마지막에는 식욕이 넘치는지 매번 가져간 음식을 싹 먹어치웠다.
삶에 대한 집착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고질병인 걸까?
우리 형제 아무도 엄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언니와 난 몰라서 못 갔고 엄마의 아들은 알고도 안 갔다고 들었다. 슬퍼하는 사람보다 안도하는 사람이 더 많은 쓸쓸하고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화장터에서 마지막을 지키며 나약하고 미숙했던 엄마를 보냈다.
죽음을 맞이 한 그 순간까지도 두려움에 떨었을 가엾은 영혼을 하늘로 보내며 마음으로 빌었다.
부디 다음 생에는 당신에게 사랑을 듬뿍 줄 수 있는 당신의 엄마를 만나 길.
부디 다음 생에는 맘껏 어리광 부리고 실컷놀 수 있는어린 시절이허락되길.
부디 다음 생에는 강인한 영혼으로 태어나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아침에 떠오른 태양도 저녁이면 지듯이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단순한 진리를 나도 알고 있고 당신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죽음 앞에선 왜 당황하게 되는 걸까? 그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삶을 회피하듯 죽음도 회피하기 때문일 거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 죽음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죽음 앞에서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가족들에게 사랑했노라 미안했노라 작별인사를 남길 수도 있고, 코앞까지 온 죽음을 끝까지 회피해 남은 자들을 쓸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두려움에 사랑의 자리를 뺏긴 삶을 살았어도 죽음 앞에선 당신 밑바닥 어딘가에 있을 사랑을 길어 올려 당신이 아닌 남은 자들을 위한 한 마디를 남길 수도 있다. 지킬게 자신 밖에 없는 사람의 삶과 죽음은 너무나 초라하다.
안예은의 '죽음에 관한 4분 15초의 이야기' 가사처럼
'내일일지 수년 뒤일지
아득히 멀고 먼 어느 날 일지 알 수 없어도'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반드시 가야 하는 그곳 운명의 길
돌아오는 이가 없어 비밀만 가득한 곳'으로 가야 할 때가 온다면 부디 선택할 수 있길 빌어본다.
부처님 말씀처럼 '고개 돌리지 말고 무상에 직면'할 수 있기를,
나의 뿌리가 되어 준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고마웠노라 미안했노라 미소 지으며 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