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주팔자를 볼 수 있게 되면 누구나 가장 먼저 자기 팔자부터 들여다본다. 남편복이 없는 여자는 다른 남자가 숨어있나 보기도 하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언제쯤 쥐구멍에 해뜰까를 보기도 한다. 대개는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문제가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인생의 숙제다.
그러다 공부가 조금씩 깊어지게 되면 다른 팔자들의 고통과 애환이 보이기 시작한다. 부모복이 없으면 남편복이라도 있거나, 그나마도 없으면 자식복이라도 있어야 살 텐데 그 어느 것 하나 없는 인생도 허다하다. 돈이 없으면 몸이라도 건강해야 할 텐데 가난한 데다 고질병까지 있어 죽을 때까지 고생만 하다 가는 팔자도 있다.
어떤 팔자는 하도 기구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대신해 하늘의 무심함을 탓하게도 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긴 하다. 좋은 부모를 만난 덕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타고난 능력을 발휘해 돈과 명예를 거머쥔 상팔자들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팔자공부의 특성상 압도적으로 사연 많은 팔자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런 팔자들을 만나다 보면 인간은 평등할지 몰라도 팔자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좋은 팔자가 있고 나쁜 팔자가 있다. 그건 팔자공부를 했건 안 했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금수저라고 다 좋은 팔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수저론이 등장한 배경엔 어쩔 수 없는 숙명론이 깔려있다.
그렇다고 좋은 팔자든 나쁜 팔자든 한번 정해진 팔자는 바꿀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몸을 받아 태어날 때 고유의 유전자를 갖고 나오듯 우리 각자는 태어나는 순간 자신만의 기운이 정해진다. 특히 태어난 月은 부모, 형제궁이라 해서 팔자주인공의 어린 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팔자 구조에 따라선 부모복이 있을지, 형제 덕이 있을지를 볼 수도 있다.
부모형제를 선택해 태어날 수 없으니 이 부분은 팔자의 디폴트값에 해당한다. 선택할 수 있다면 아무도 가난한 집안의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선택하진 않을 것이다. 여기까진 숙명론이 맞다.
하지만 나머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
아무리 비겁이 해로운 팔자라도 이를 알고 이익을 좇지 않으면 해를 면할 수도 있다. 女命의 경우 아무리 관성이 해롭더라도 나쁜 남자에게만 끌리는 자신의 업보를 알면 이를 경계해 피할 수도 있다
아무리 가난한 팔자라도 주식투자대신 자기 계발에 투자해 몸값을 높이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 팔자를 아는 게 중요하다.
팔자를 안다는 건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선택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선택할 수 없는 일에는 원망대신 인정을 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일에는 변명대신 책임을 지는 것이다.
팔자를 안다는 건 자기 자신과 자신이 걸어온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삶을 이해한다는 건 자신의 욕망대로 되지 않는 팔자에 대한 원망을 거두고 팔자에 맞게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대한 섭섭함을 거두고 오늘 하루 무탈함에 감사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온 우주를 이해하는 일이다.
Between stimulus and response, there is a space .
어쩌면 빅터 프랭클이 말한 자극과 반응 사이에 있는 공간은 자신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이 넉넉해지고 자극과 반응 사이에 속도는 느리게 흐른다. 넉넉해진 공간 속에서,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힘과 여유를 갖게 된다.
어쩌면 자극과 반응사이의 공간이 우리의 마음이며, 마음만이 우리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일지도 모를 일이다.
# 연재를 마치며
가을바람이 살랑이던 어느 날 불현듯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내 삶을 정리해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처럼 마음이 급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글을 쓰는 게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 모르기에 시작한 일이었다. 일단 시작했으니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고 죄 없는 머리털을 매일 쥐어뜯었다. 다행히 변변찮은 글에 매번 라이킷을 눌러 주시는 마음 따뜻한 작가님들 덕에 무사히 연재를 마칠 수 있었다.
첫 글을 발행한 날, 식사준비를 해야 하는데 온통 정신이 브런치에 매여있었다. 아무도 내 글을 읽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발행취소'를 누르고 싶은 유혹과 싸웠다. 나이 드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게 이럴 땐 꽤 쓸만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이란 사실과 이 나이에 뭔들 못하겠나 싶은 똥배짱이 합세해 간신히 '발행취소'의 유혹을 이겼다. 첫 글을 올리고 얼마 되지 않아 라이킷 알림음이 떴을 때의 그 안도감은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라이킷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았다.
브런치 연재글을 쓰는 건 명리 공부만큼이나 고되고 힘들었지만 2024년 甲辰년을 잊지 못하게 할 추억이 될듯하다. 브런치에서 만난 작가님들의 글을 읽고 댓글로 소통하는 재미는 고되고 힘든 여정에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든든했다.
또한 글을 쓰면서 만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단단하고 의연해서 놀랐다. 글을 쓰기 전에는 나 자신이 항상 불안에 떠는 사시나무 같다고 느꼈는데 막상 마주한 '나'는그보다는 좀 더 단단한 나무에 가까웠다.
글 쓰는 게 뭐라고 세상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내가 보는 세상은 달라졌다. 아마도 글을 쓰는 동안 내 안의 무언가가 자라나 세상을 보는 눈높이가 달라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