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세인트마이클스 바다가 열리고, 잔디 위에 앉아

기다림이 주는 선물, 그리고 모세의 기적

by 명준표 Jun Pyo Myong

오래된 친구를 만난 기분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콘월의 해안가 마을 마라지온(Marazion)에 도착하자,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성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오래전 프랑스 여행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 몽생미셸 (Mont Saint Michel)

'몽생미셸(Mont Saint-Michel).'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봤던 그 웅장한 수도원과 쌍둥이처럼 닮은 모습. 하지만 느낌은 사뭇 달랐습니다. 몽생미셸이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고 도도한 느낌이었다면, 영국의 '세인트 마이클스 마운트'는 조금 더 둥글고 푸근한, 마치 시골에 사는 형제 같았습니다.

낯선 땅끝 마을에서 아는 얼굴을 만난 듯 반가웠습니다. "예전에 갔던 곳이랑 닮았지?"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는 바다가 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바다 밑바닥을 걷는 기분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파도가 넘실대던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물속에 잠겨 있던 구불구불한 돌길(Causeway)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치 '모세의 기적'을 눈앞에서 보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축축하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나는 돌길을 밟았습니다. 방금 전까지 물고기들이 헤엄치던 바다의 밑바닥을 걷는 기분.

미끄러운 돌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성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순례였습니다.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자연이 허락한 시간에만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이 길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거인이 살았던 전설의 섬

역광으로 검게 보이던 성이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섬에 도착해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중세의 수도원이자 요새였던 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이곳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옛날 이 섬에 '코모란(Cormoran)'이라는 거인이 살았는데, '잭'이라는 소년이 함정을 파서 거인을 물리쳤다는 '잭과 콩나무' 이야기의 원류가 되는 전설입니다. (지난번 베드러선 스텝스에 이어 콘월은 거인들의 땅인가 봅니다.)

코로나가 잦아든 시기지만, 실내 밀집도는 줄여야 했기에, 섬에 도착했지만, 아쉽게도 성 내부 관람은 불가능했습니다. 힘들게 왔지만, 여기에서 성의 내부를 볼 수 없다는 실망감이 들었습니다.

평소 진료실에서의 저였다면 스트레스를 받았을 겁니다. 의사는 늘 정확한 진단과 완치라는 '목표(Outcome)'를 달성해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여기까지 와서 내부를 들어가서 성의 주인이 되어보는 생각을 했으니,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패배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하지만 이번엔 달랐습니다. 굳게 닫힌 문은 오히려 우리를 성벽 아래 '정원'으로 안내했습니다. 난류의 영향으로 알로에 같은 아열대 식물이 자라는 이색적인 정원을 거닐며 생각했습니다.

"꼭 정해진 코스로 가야만 답인가? 우회로에 더 예쁜 꽃이 피어있는데." 강박적으로 목표를 향해 달리던 제게, 닫힌 성문은 좀 쉬어가라는 처방전처럼 느껴졌습니다.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정원을 걷다 보니, 실내를 구경하는 했다면 만나지 못했을 친구를 만났습니다.

아주 귀엽죠? 귀여운 고슴도치가 우릴 보더니 구석으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갔습니다.

멈추면 보이는 것이라는 말이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겠죠?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광부의 도시락과 휴식

우리는 성 아래 넓은 잔디 마당(Village Green)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코니쉬 파스티 by Gemini 3.1

그리고 저 건물 옆에는 간이 가게가 있습니다. 가게에서 산 저의 인생음식 따끈한 '코니쉬 파스티(Cornish Pasty)'를 꺼냈습니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서 이 음식의 유래를 잘 압니다. 과거 이 지역 광부들이 갱도 안에서 식사할 때, 비소 같은 유해 물질이 묻은 손으로 음식을 직접 만지지 않으려 두꺼운 손잡이(Crust)를 만들어 먹던 도시락이죠. 치열한 노동의 현장에서 탄생한 음식을, 가장 한가로운 잔디밭에 누워 먹는 아이러니죠. 이곳에서도 일이랑 연결되는 사고를 하는 건 직업병인 것 같네요. 직업환경의사의 직업병입니다.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한 고기 향과 함께 바다 내음이 훅 끼쳐왔습니다.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등 뒤에는 든든한 성이 바람을 막아주고, 눈앞에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곳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으면,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에는 따뜻한 햇살이 우릴 감싸죠. 그 따뜻한 햇살이 얼굴을 매만지고 바닷바람의 시원함이 마음의 평온함을 줍니다.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는 '성취'는 없었지만, 가족과 잔디 위에 뒹구는 '행복'은 있었습니다.

이 파이 한 조각과 멍하니 바라보는 수평선

평온함이 감돕니다.

영국 콘월(Cornwall), 펜잔스(Penzance), 마라지온(Marazion), 세인트마이클스 마운트 (St Michael's Mount)

Dr. Myong's Travel Tip: 세인트 마이클스 마운트

마음가짐 (Mindset): 성 내부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고 조급해하지 마세요. 이곳의 진짜 매력은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느끼는 '여백'에 있습니다.

코니쉬 파스티(Cornish Pasty): 콘월 광부들의 애환이 서린 소울 푸드입니다. 겉의 두꺼운 빵 테두리는 원래 손잡이 용도로 버렸지만, 지금은 다 드셔도 됩니다. (맛있으니까요!)

피크닉: 성 입구 쪽 잔디밭(Dairy Lawn)은 최고의 명당입니다. 돗자리가 없다면 저처럼 겉옷을 깔고라도 꼭 눕거나 앉아보세요. 비타민 D 합성과 세로토닌 분비에 최고입니다.

콘월 가는 길: 사실 런던에서 콘월까지 가는 길은 멉니다. 그래서 뉴키공항으로 국내선을 타고 이동하거나, 콘월로 1주일 정도 한 곳 씩 둘러보면서 운전하면서 1-2일에 걸쳐서 여행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저희는 가는 길에 스톤헨지도 구경하고, 더들도어도 들렸다가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콘월은 정말 인생의 기억에 남는 곳입니다.


"파이 부스러기마저 즐거웠던 바다 소풍을 뒤로하고, 이제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곳으로 떠납니다.

폐허가 된 탑 위에서 내려다본 '하얀색의 기적'. 온통 꽃들로 채워진 낭만의 정원,

'시싱허스트 캐슬(Sissinghurst Castle)'이 우리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