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공허함
코프 캐슬의 거친 돌무더기를 뒤로하고 동쪽으로 갈 시간입니다.
런던 시내에서 차를 달려 도착한, 이곳에는 잉글랜드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엽서 속 풍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보디엄 성(Bodiam Castle)'입니다.
주차장을 지나 숲길을 조금 걷자, 시야가 탁 트이며 거대한 물웅덩이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성이 나타났습니다. 네 개의 원형 탑, 견고한 성벽, 그리고 성을 감싸고 있는 넓은 호수 같은 해자(Moat).
마치 백조가 호수 위에 떠 있는 듯 우아했습니다. 전투를 위한 치열한 요새라기보다는,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지어진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 비현실적인 풍경에 압도되어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성 안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 주변의 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며, 물 위에 비친 성의 반영을 감상했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본 보디엄 성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저 웅장한 성벽 너머, 실제 내부는 지붕 하나 없이 텅 비어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겉은 14세기의 위용을 그대로 뽐내고 있지만, 속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뼈대만 남은 '속 빈 강정'이라는 것을요.
지금은 오리가 이 성의 주인이 되어 해자와 주변의 잔디밭을 거닐고 있습니다.
문득 병원 진료실에서의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흰 가운을 입고 완벽한 의사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텅 비어가던 나. 보디엄 성의 공허함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나도 사실은 버티고 있는 거야."
물 위에 비친 성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화려함 뒤에 숨겨진 그 쓸쓸함이 오히려 제 마음을 깊이 끌어당겼습니다. 굳이 안으로 들어가 확인하지 않아도, 그 공허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저는 묵묵히 성벽을 바라보며 위로를 건넸습니다.
보디엄이 '감추고 싶은 공허'라면,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스코트니 캐슬(Scotney Castle)'은 '드러내어 아름다운 폐허'입니다.
이곳은 19세기에 집주인이 일부러 허물지 않고 남겨둔 '의도된 폐허'입니다. 무너진 벽 틈으로 담쟁이덩굴이 자라고, 깨진 창문 너머로 꽃들이 피어나도록 계산된 '픽처레스크(Picturesque)' 정원의 정수죠.
보디엄 성이 겉모습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긴장감이 느껴진다면, 스코트니는 무너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자연에게 내어주는 편안함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당시 내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아서 무너진 벽 사이를 아이들과 함께 뛰어다니지 못했지만, 해자 주변의 산책길을 돌면서 360도의 모습을 볼수 있었습니다. 손으로 돌의 감촉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 질감은 충분히 느낄수 있었습니다. 걸으면서 느낀 숲의 향기는 잔잔한 온기로 편안함을 줍니다.
완벽한 외관을 유지하려 홀로 버티는 보디엄, 그리고 무너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스코트니. 두 개의 성은 마치 제가 겪어온 마음의 여정 같았습니다. 지치기 전까지 저는 보디엄 성처럼 살았습니다. 속이 비어가는 줄도 모르고 겉보기에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스코트니 처럼 조금 무너져 있어도, 그 틈 사이로 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요.
보디엄의 성문은 열어보지 못했지만 아쉽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완벽한 환상과 따뜻한 현실, 그리고 제 마음속 깊은 위로까지 모두 챙겨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Dr. Myong's Travel Tip: 보디엄 & 스코트니
보디엄 성 (Bodiam Castle):
관람 팁: 굳이 내부에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해자(Moat)를 따라 한 바퀴 도는 산책로가 최고의 포토존이며, 성의 사면이 물에 비치는 모습이 각기 다릅니다.
주차: NT 회원은 무료 주차입니다.
스코트니 캐슬 (Scotney Castle):
동선: 언덕 위 저택(New House)에서 내려다보는 뷰도 좋지만, 꼭 아래로 내려가 폐허가 된 옛 성(Old Castle) 사이를 걸어보세요.
거리: 두 성은 차로 20분 거리이므로 하루 코스로 묶기 좋습니다.
"잔잔한 물 위의 성들을 뒤로하고, 다음 주는 바다가 갈라져야만 닿을 수 있는 신비의 섬으로 떠납니다.
하루에 두 번, 물길이 열릴 때만 허락되는 곳.
영국의 몽생미셸이라 불리는 '세인트 마이클스 마운트(St Michael’s Mount)'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Ps. 스코트니 성 뒤로는 새로 지은 저택이 있습니다. 이 저택은 높은 곳에 지어져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저 푸른 들에는, 하얀 작은 꽃들이 아주 아름답게 우리를 반긴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이 샷이 여기서 탄생합니다. 건물 벽의 색깔과 무늬가 이끼가 끼어있는 의자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