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방과 초록의 들판속을 걷다
콘월의 바다에서 '쉼'을 얻었다면, 이곳 켄트(Kent)에서는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정원이라 불리는 켄트의 좁은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곳, 전 세계 정원사들의 영원한 로망
'시싱허스트 캐슬 가든(Sissinghurst Castle Garden)'입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진한 장미 향기. 이곳은 코프 캐슬처럼 전쟁의 상처를 전시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붉은 벽돌 폐허는 이제 꽃들을 위한 가장 드라마틱한 배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폐허조차 캔버스로 만들어버린 이곳의 생명력 앞에서, 저의 오감(五感)이 맹렬하게 깨어났습니다. "아, 예쁘다" 정도의 감탄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붉은 벽돌과 초록 잎사귀의 강렬한 대비는 제 안의 잠자고 있던 열정 스위치를 '탁' 하고 켜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탑에 올라가 전체를 조망하는 대신, 정원의 깊숙한 속살을 파고들기로 했습니다. 시싱허스트는 마치 집처럼 벽돌담과 덤불로 구획이 나뉘어 있어, '정원의 방(Garden Rooms)'이라 불립니다.
문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어떤 방은 온통 보라색 꽃으로 가득 찬 신비로운 공간이었고(Purple Border), 또 다른 문을 열면 붉은 장미가 덩굴져 쏟아지는 정열의 공간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미로 찾기를 하는 아이들처럼, 우리 가족은 "다음 공간엔 뭐가 있을까?" 하며 신나게 뛰어다녔습니다.
외교관 남편 해럴드가 그은 반듯한 선(Line) 안에, 시인 아내 비타가 제멋대로 심어놓은 풍성한 꽃들.
그 '질서와 자유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대단했습니다. 정적인 산책이 아니라, 생명력이 꿈틀대는 정글을 탐험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이 정원의 클라이맥스, '화이트 가든(White Garden))'. 이곳은 오직 흰색 꽃과 은회색 잎을 가진 식물들만 허락된 공간입니다. 의사인 저에게 흰색은 늘 차가운 가운이나 병실의 색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흰색은 달랐습니다.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부서지는 하얀 꽃잎들은 '빛의 폭발'이었습니다.
담벼락 건너 정원의 공간들의 화려한 색의 꽃들과 대비됨은 순백의 꽃들과, 은빛 쑥류가 어우러진 풍경은 단순한 '깨끗함'을 넘어선 '숭고한 화려함'이었습니다.
색을 비워낸 것이 아니라, 모든 빛을 머금고 뿜어내는 듯한 에너지. 그 눈부신 생명력 앞에서 저는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압도당하고 있었습니다.
제 안의 열정도 저 하얀 꽃들처럼 다시 피어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정원 안에서의 경험이 밀도 높은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면, 정원 밖은 자유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벽돌담을 벗어나 성 주변을 감싸고 있는 드넓은 초지(Meadow)와 호숫가를 걸었습니다.
잘 가꿔진 꽃밭도 좋지만, 역시 인간은 탁 트인 땅을 밟아야 하나 봅니다. "아빠, 나 잡아봐요!" 아이들과 함께 무릎까지 오는 풀숲을 헤치며 달렸습니다. 향기로운 정원의 공기와 켄트 지방의 시원한 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싱허스트의 채소농장인 Vegetable Garden을 들리면 직접 기르는 농원을 볼 수 있습니다.
생장의 가든에서 자라나는 채소와 열매들의 기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가든의 가장자리에는 채소가 자라는 가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의자들이 있습니다. 빈 자리에 앉아서, 가든을 조망하는 가운데
우리가 앉은 의자 옆으로 참새가 와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물론 그 친구에게 가지고간 간식을 조금 나눠주었구요.
시싱허스트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정원의 아름다움과, 꾸미지 않은 대자연의 광활함.
이 두 가지를 모두 누리며 걷는 발걸음엔 힘이 실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지친 여행자가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흙과 바람, 그리고 꽃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탐험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탐험가의 마음으로: 이곳은 한눈에 다 보이는 평면적인 정원이 아닙니다. 미로처럼 숨겨진 '방'들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재미를 느껴보세요. 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도 추천합니다.
초지 산책(Moat Walk): 대부분의 관광객은 정원만 보고 가지만, 성 주변의 호수와 초지를 걷는 산책로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화려한 꽃구경 뒤에 눈을 씻어주는 초록의 휴식을 놓치지 마세요.
화이트 가든: 해 질 녘이나 흐린 날에 가면 흰 꽃들이 형광등처럼 빛나는 신비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순백의 치유를 가슴에 담고, 다음 주는 '화려한 연극 무대' 같은 정원으로 떠납니다.
불타버린 저택의 벽을 허물지 않고, 그 자체를 가장 드라마틱한 배경으로 만든 곳. 예술가 가문의 감각이 살아 숨 쉬는 서식스의 보석, '나이맨스(Nymans)'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ps. 시싱허스트 정원의 공간에 숨겨진 공간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 공간을 찾아 보세요. 아주 멋진 사진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