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웅의 '블랙독(우울증)'을 달래주던 계곡물 소리
영국을 구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그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 때문에, 저는 속으로 엄청나게 거대하고 권위적인 대저택을 상상하며
3월의 어느날 켄트(Kent) 지방의 '차트웰(Chartwell)'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저택 입구에 도착해 마주한 풍경은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웅장한 대리석 기둥이나 화려한 장식 대신, 덩굴식물이 벽을 타고 오르는 붉은 벽돌집. 영국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낡았지만 다정한 온기가 느껴지는 집이었습니다.
처칠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거대한 블렌하임 궁전(Blenheim Palace)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평생 가장 사랑하고 마음의 안식처로 삼았던 곳은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바로 이 소박한 차트웰이었습니다. 입구에 선 순간, '위대한 정치가'가 아닌 '인간 처칠'의 체온이 훅하고 느껴졌습니다.
차트웰 주변의 들판을 걷다 보면, 아주 이질적이고 묘한 지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화로운 초원 중간중간에 마치 거대한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움푹 패인 웅덩이'들이 흉터처럼 남아있습니다.
안내도 PDF 파일은 다음의 링크 (확실히 최신판이 digital-frendly하네요)
라이언이 있는 곳들이 폭탄이 떨어진 흔적들입니다. 처음엔 자연스러운 굴곡인 줄 알았지만, 곧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이 쏟아부은 폭탄의 흔적(Bomb Craters)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런던으로 향하던 폭격기들이 길목에 있던 처칠의 집 주변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이죠. 지금은 움푹 파인 곳들이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신해서 있습니다.
의사로서 진료실에서 환자들의 몸에 남은 흉터를 볼 때면, 그가 겪어낸 치열한 시간들이 고스란히 전해지곤 합니다. 차트웰의 앞마당에 남은 푹 패인 웅덩이들은 이 평화로운 곳이 사실은 '전쟁의 한복판'이자 목숨을 건 최전선이었음을 묵묵히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도, 처칠은 이곳에서 버티며 영국을 이끌었습니다.
저택 내부로 들어가 보면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하나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그가 '노벨상 수상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야가 평화상이 아닙니다. 1953년, 처칠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역사와 전기 서술의 탁월함, 그리고 고귀한 인간적 가치를 수호하는 뛰어난 연설"
이것이 선정 이유였습니다. 그는 이곳 차트웰의 서재에서 서서 글을 쓰며(그는 스탠딩 데스크 애호가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 같은 대작들을 집필했습니다.
곳곳에 남겨진 가족들의 흔적, 손때 묻은 책상, 그리고 무엇보다 제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캔버스와 물감'이었습니다.
처칠은 평생토록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을 '블랙독(Black Dog, 검은 개)'이라고 불렀죠. 국가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엄청난 스트레스와 번아웃이 찾아올 때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정치가의 마이크가 아니라 낡은 붓과 물감이었습니다.
내부의 방들을 둘러보며 저는 깊은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흰 가운을 입고 환자들 앞에서는 늘 완벽하고 강한 척해야 했지만, 속으로는 저만의 '블랙독'과 싸워야 했던 지난날들. 처칠 역시 위대한 영웅이기 이전에, 쉴 곳이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한 연약한 한 명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집 안을 벗어나 정원으로 향했습니다. 흐린 흑백 하늘과 대비되는 노란 수선화 꽃밭을 지나 숲이 우거진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졸졸졸 흐르는 작은 계곡(Stream)이 나타났습니다.
폭격의 상흔이 남은 언덕을 지나, 이 깊고 고요한 계곡 앞에 서니 비로소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처칠은 이 물소리를 들으며 정원에 직접 벽돌을 쌓아 담장을 만들고, 계곡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으며 마음의 에너지를 회복했다고 합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가보았습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역동적인 물의 에너지가 제 손끝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전쟁의 참혹한 폭격(웅덩이) 속에서도, 맑은 물이 흐르는 정원(계곡)을 가꾸며 스스로를 치유했던 윈스턴 처칠.
그의 정원을 거닐며 저 역시 깨달았습니다. 상처 입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언제든 도망쳐 숨을 고르고 붓을 들 수 있는 자신만의 '차트웰'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내부 관람 예약: 차트웰 저택 내부는 시간대별로 인원을 제한하여 입장시킵니다. 도착하자마자 내부 입장 시간부터 먼저 예약해 두고, 남는 시간에 정원과 숲을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폭격의 흔적: 산책로를 걸을 때 단순히 풍경만 보지 말고, 바닥의 움푹 패인 폭격 웅덩이(Bomb Crater)를 찾아보세요. 평화와 전쟁의 극명한 대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된 곳도 있습니다.
스튜디오(화실): 저택 밖에 따로 마련된 처칠의 화실(Studio)은 꼭 들러보세요. 수백 점의 생동감 넘치는 작품들이 그의 또 다른 자아를 보여줍니다.
산책길 속의 그림들: 처칠 수상이 그린 그림들을 표지판으로 두었어요. 현장과 그림을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전쟁 영웅이 남긴 캔버스와 치유의 계곡을 뒤로하고, 다음 주는 잉글랜드 중부의 거대한 대자연 속으로 달려갑니다. 대자연 속에서 아주 작고 사랑스러운 동화 속 세상을 만나볼 시간이지요.
광활한 호수 지방(Lake District)의 자연을 사랑해, 전 재산을 바쳐 그곳을 지켜낸 한 여성. 파란 재킷을 입은 토끼 '피터 래빗'이 태어난 아름다운 농가, '힐 탑(Hill Top)'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ps1. 우리 가족이 다녀온 시기가 영국의 3월, 드디어 회색빛 구름 속에서 땅에서는 수선화가 자라올라 어둠 속에 노란 빛을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수선화가 피는 들녘 옆으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을 보면, 마음속의 우울함은 모두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ps2. 가족들과 함께, 볼수 있는 가이드가 있습니다. 제가 설명한 글 보다 훨씬더...... 자세히 알수 있지요.
ps3. 블렌하임 궁전은 그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규모의 대저택과 영지로 한번에 둘러볼 수 없어 두번 방문했었던 곳입니다. 처칠의 생가이자, 왕에게서 하사받은 저택은 두번 가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