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 선 주인공처럼, 심장이 뛰는 정원
켄트의 시싱허스트에서 '하얀색의 치유'를 경험했다면, 서식스(Sussex)로 넘어와 만난 '나이맨스(Nymans)'는 제 안의 잠들어 있던 '예술적 본능'을 깨우는 곳이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공기부터 달랐습니다. 시싱허스트가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같다면, 나이맨스는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귀부인 같았죠. 이곳은 독일계 유대인인 '메셀(Messel)' 가문이 3대에 걸쳐 만든 정원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정원사가 아니라, 전 세계의 희귀한 식물을 모으는 열정적인 수집가(Plant Hunters)이자 예술가였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마치 무대 조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자, 이제 당신이 주인공이야. 마음껏 걸어봐." 정원이 제게 큐(Cue) 사인을 보내는 듯했습니다.
나이맨스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저택의 폐허(The Ruins)'입니다. 1947년 화재로 집의 대부분이 타버렸지만, 메셀 가문은 남은 벽을 허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텅 빈 창문과 아치형 문을 정원의 배경으로 삼았죠.
고딕 양식의 뾰족한 창문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이고, 그을린 돌벽을 타고 보랏빛 등나무 꽃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시싱허스트의 폐허가 '소박한 배경'이었다면, 나이맨스의 폐허는 '압도적인 무대장치'였습니다.
우리는 그 아치형 문을 통과하며 마치 연극 배우가 된 기분을 느꼈습니다. 아이들은 기둥 뒤에 숨어 까르르 웃고, 저는 웅장한 돌벽을 만지며 그 거친 질감을 느꼈습니다. 슬픔이나 공허함 따위는 없었습니다. 오직 폐허와 식물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시각적 드라마에 심장이 쿵쿵 뛰었습니다.
이곳을 걷다 보면 "어? 영국에 이런 나무가?" 하고 놀라게 됩니다. 식물 사냥꾼이었던 메셀 가문은 칠레, 남아메리카, 히말라야 등지에서 수집해 온 이국적인(Exotic) 식물들을 이곳에 심었습니다.
영국 토종 식물들이 차분하고 은은하다면, 이곳의 이국적인 식물들은 잎도 크고 색깔도 원색에 가깝습니다. 그 낯설고 강한 생명력이 제 안의 에너지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의사로서 매일 반복되는 루틴 속에 갇혀 살던 저에게, 이 낯선 식물들이 말을 거는 듯했습니다. "조금 더 과감해져도 돼. 남들과 달라도 괜찮아. 이렇게 화려하게 피어봐." 나이맨스의 식물들은 저에게 '안정'이 아니라 '모험'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정원 구역을 지나면, 시야가 뻥 뚫리며 '서스 윌드(Sussex Weald)'의 광활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잘 꾸며진 무대에서 연기를 마친 배우가 무대 뒤로 나와 시원한 공기를 마시는 기분이랄까요. (제가 가진 사진에서는 이 양한마리가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향해 크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초록의 에너지가 차올랐습니다. 이제 더 이상 '힐링'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탄하고, 달리고 싶으면 달릴 수 있는 건강한 생명력이 제 안에 가득 차 있음을 느꼈습니다.
나이맨스는 저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정원은 단순히 바라보며 위로받는 곳이 아니라, 내 안의 열정을 투영하고 에너지를 교환하는 '역동적인 파트너'라는 사실을요.
포토존: 저택의 아치형 돌문(Stone Arch)은 최고의 포토존입니다. 맑은 날엔 창문 너머 파란 하늘을, 흐린 날엔 고딕 소설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산책 코스: 정원만 보고 가지 마세요. 정원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숲길(Woodland)을 따라 걸으면 서식스의 아름다운 숲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운동화 필수!)
중고 서점: 입구 쪽에 있는 내셔널 트러스트 중고 서점(Bookshop)은 보물창고입니다. 정원 관련 희귀 서적이나 빈티지한 책을 득템할 수 있습니다.
"나이맨스의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와, 다음 주는 한 위대한 인물의 삶 속으로 들어갑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던 곳. 가장 치열했던 순간에 가장 평온한 시간을 보냈던 윈스턴 처칠의 안식처, '차트웰(Chartwell)'이 우리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