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훈장처럼 품고 사는 법
솔즈베리 평원을 떠나 남쪽 해안인 '도싯(Dorset)' 지방으로 차를 달렸습니다.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넘자, 저 멀리 푸른 언덕 위에 이빨 빠진 거대한 회색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코프 캐슬(Corfe Castle)'이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성으로 향하는 길, 우리는 성보다 먼저 그 발치에 자리 잡은 '마을'을 만났습니다. 회색 돌로 촘촘히 쌓아 올린 낮은 집들, 좁은 골목길, 그리고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 이곳은 마치 시간이 17세기에 멈춰버린 듯했습니다.
화려한 간판이나 네온사인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돌집들 사이를 걸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400년 전, 이 길을 오갔을 기사들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말이죠. 마을은 낯선 여행자를 과거의 시간 속으로 안내하는 '타임머신'이었습니다.
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드디어 코프 캐슬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가까이서 본 성은 처참했습니다. 성벽은 반쯤 허물어져 있었고, 어떤 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마치 거인이 주먹으로 내려친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서짐'이 이 성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들쭉날쭉하게 솟은 회색 돌들은 마치 '깨진 왕관'처럼 보였습니다. 완벽하게 보존된 매끈한 성에서는 느낄 수 없는 비장미(悲壯美).
성 꼭대기에 올라 우리가 걸어온 마을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장난감처럼 작은 회색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너머로 도싯의 푸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거센 바람이 부서진 성벽 사이를 통과하며 "휘이잉-" 하고 우는소리를 냈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이 성이 간직한 치열했던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성은 세월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1646년 영국 내전 당시, 의회군(Roundheads)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당시 성주였던 '뱅크스 부인(Lady Bankes)'은 왕당파로서, 소수의 병력만으로 수천 명의 의회군에 맞서 무려 3년이나 성을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내부의 배신으로 성문이 열리고 말았죠.
점령군은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화약으로 폭파해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기울어진 탑과 마을로 굴러떨어진 거대한 돌덩이들은 400년 전 폭발의 흔적입니다. (실제로 마을의 집들 중 상당수는 당시에 무너져 내린 성의 돌을 가져다 지었다고 합니다. 마을이 성이고, 성이 곧 마을인 셈입니다.)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이 무너진 성벽의 돌틈 사이에도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바쁘게 지내다 어느날 찾아온 낯선 곳에서 거기에 앉아야만 보이는 사소한 것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의사로서 나는 늘 '완치'와 '회복'만을 정답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상처는 없애야 할 대상이고, 환자 앞에서는 완벽함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하는 존재, 무너짐은 실패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반쯤 부서진 채로 400년을 버텨온 코프 캐슬은 저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상처 입은 모습도 나야. 무너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야.
봐,
나는 여전히 이 언덕의 주인으로 당당히 서 있잖아.
완벽하려고 애쓰다 부러지는 것보다, 때로는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마저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단단해지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깨진 틈 사이로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들이 그 어느 화려한 정원의 꽃보다 찬란해 보였습니다.
Dr. Myong's Travel Tip: 코프 캐슬(Corfe Castle)
위치: The Square, Corfe Castle, Wareham BH20 5EZ
주차: Castle View Car Park (내셔널 트러스트 회원 무료) 주차장에서 마을을 통과해 성 입구까지 도보로 약 10분 정도 걸립니다. 이 산책로가 아주 예쁩니다.
마을 감상: 성으로 올라가기 전, 마을의 베이커리(The Pink Goat 등)나 펍에 들러보세요. 오래된 건물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증기기관차: 운이 좋다면 성 위에서 마을 옆으로 지나가는 증기기관차(Swanage Railway)를 볼 수 있습니다. 성과 기차가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거친 바람이 부는 언덕을 내려와, 다음 주는 잔잔한 '물' 위로 떠납니다.
누구나 한 번쯤 꿈꿨던 동화 속 성의 모습. 해자(Moat) 위에 떠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성과, 숲속에 숨겨진 그림 같은 폐허. 물 위에 비친 중세의 낭만, '보디엄 성과 스코트니 캐슬'이 우리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