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무너져서 더 아름다운 성, 코프 캐슬

상처를 훈장처럼 품고 사는 법

by 명준표 Jun Pyo Myong

회색빛 시간의 마을을 지나


솔즈베리 평원을 떠나 남쪽 해안인 '도싯(Dorset)' 지방으로 차를 달렸습니다.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넘자, 저 멀리 푸른 언덕 위에 이빨 빠진 거대한 회색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코프 캐슬(Corfe Castle)'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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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차를 대고 성으로 향하는 길, 우리는 성보다 먼저 그 발치에 자리 잡은 '마을'을 만났습니다. 회색 돌로 촘촘히 쌓아 올린 낮은 집들, 좁은 골목길, 그리고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 이곳은 마치 시간이 17세기에 멈춰버린 듯했습니다.

화려한 간판이나 네온사인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돌집들 사이를 걸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400년 전, 이 길을 오갔을 기사들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말이죠. 마을은 낯선 여행자를 과거의 시간 속으로 안내하는 '타임머신'이었습니다.


깨진 왕관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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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드디어 코프 캐슬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가까이서 본 성은 처참했습니다. 성벽은 반쯤 허물어져 있었고, 어떤 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마치 거인이 주먹으로 내려친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서짐'이 이 성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들쭉날쭉하게 솟은 회색 돌들은 마치 '깨진 왕관'처럼 보였습니다. 완벽하게 보존된 매끈한 성에서는 느낄 수 없는 비장미(悲壯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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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꼭대기에 올라 우리가 걸어온 마을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장난감처럼 작은 회색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너머로 도싯의 푸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거센 바람이 부서진 성벽 사이를 통과하며 "휘이잉-" 하고 우는소리를 냈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이 성이 간직한 치열했던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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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 그리고 의도된 파괴

이 성은 세월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1646년 영국 내전 당시, 의회군(Roundheads)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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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주였던 '뱅크스 부인(Lady Bankes)'은 왕당파로서, 소수의 병력만으로 수천 명의 의회군에 맞서 무려 3년이나 성을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내부의 배신으로 성문이 열리고 말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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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군은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화약으로 폭파해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기울어진 탑과 마을로 굴러떨어진 거대한 돌덩이들은 400년 전 폭발의 흔적입니다. (실제로 마을의 집들 중 상당수는 당시에 무너져 내린 성의 돌을 가져다 지었다고 합니다. 마을이 성이고, 성이 곧 마을인 셈입니다.)


상처도 삶의 일부니까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이 무너진 성벽의 돌틈 사이에도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바쁘게 지내다 어느날 찾아온 낯선 곳에서 거기에 앉아야만 보이는 사소한 것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의사로서 나는 늘 '완치'와 '회복'만을 정답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상처는 없애야 할 대상이고, 환자 앞에서는 완벽함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하는 존재, 무너짐은 실패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반쯤 부서진 채로 400년을 버텨온 코프 캐슬은 저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상처 입은 모습도 나야. 무너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야.
봐,
나는 여전히 이 언덕의 주인으로 당당히 서 있잖아.

완벽하려고 애쓰다 부러지는 것보다, 때로는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마저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단단해지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깨진 틈 사이로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들이 그 어느 화려한 정원의 꽃보다 찬란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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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Myong's Travel Tip: 코프 캐슬(Corfe Castle)

위치: The Square, Corfe Castle, Wareham BH20 5EZ

주차: Castle View Car Park (내셔널 트러스트 회원 무료) 주차장에서 마을을 통과해 성 입구까지 도보로 약 10분 정도 걸립니다. 이 산책로가 아주 예쁩니다.

마을 감상: 성으로 올라가기 전, 마을의 베이커리(The Pink Goat 등)나 펍에 들러보세요. 오래된 건물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증기기관차: 운이 좋다면 성 위에서 마을 옆으로 지나가는 증기기관차(Swanage Railway)를 볼 수 있습니다. 성과 기차가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거친 바람이 부는 언덕을 내려와, 다음 주는 잔잔한 '물' 위로 떠납니다.

누구나 한 번쯤 꿈꿨던 동화 속 성의 모습. 해자(Moat) 위에 떠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성과, 숲속에 숨겨진 그림 같은 폐허. 물 위에 비친 중세의 낭만, '보디엄 성과 스코트니 캐슬'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영국, 서식스 (Sussex), 보디엄 성 (Bodiam Castle)
영국, 캐트 (Kent), 스코트니 성 (Scotney Cas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