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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자 Apr 20. 2023

86세 학생, 드디어 생각을 쓰다

업어드릴게요

나는 늦어도 수업 시간 15분 전 마을 학교에 도착한다. 반장님은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인사를 한다.

“차려, 선생님께 인사.”

 숨 돌릴 새도 없다. 겉옷 벗고 출석부와 교과서 꺼내고 인사하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다. 더 일찍 가도 인사부터 하신다. 그래서 인사하면 바로 수업 시작한다. 먼저 숙제 검사해 온 것을 칠판에 자석으로 붙인다. 이것이 학생들이 제일 기다리는 매 수업의 하이라이트다.     


 글 한 줄 쓰라고 말씀드리면 머리가 깨질 것 같다던 학생들이다. 요즘은 학생들이 그림 도안에 색칠하고 글을 쓰겠다고 자청하신다. 이 작업을 수업 시간에 하면 교과서 진도를 제대로 나갈 수 없다. 그래서 그림과 글 쓰는 작업은 집에서 숙제하는 것으로 약속했다. 그러면 숙제가 늘어난다. 그래도 재미있으니 하고 싶다 하신다.     

 나도 과제를 만들려면 컴퓨터로 작업해 인쇄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렇지만 글자를 쉽게 습득하는 방법이란 걸 학생도 선생도 터득했다. 수고롭지만 도움도 되며 재미있어하시니 열심히 만든다. 또 학생들이 좋아하니까 기꺼이 한다.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분들이 쓰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교과서 쓰기는 한 번 쓰는 것으로 했지만 열 번 쓰고 싶은 학생은 열 번, 본인이 쓸 수 있을 만큼이 숙제다. 아프거나 일이 있으면 숙제는 안 해도 된다고 말씀드린다. 대신 여러 번 쓰는 학생에게 노트 제공은 얼마든지 하겠다고 약속했다.     

 

교과서 쓰기 숙제 검사는 교과서 수업 시작 전에 한다. 글 쓰고 색칠하는 숙제는 수업 때마다 숙제를 수거해 집에 가지고 온다. 숙제 검사 할 때 글 쓴 것에 대한 답 글을 한 분 한 분 쓴다. 그리고 반드시 맞춤법 틀린 것을 수정한다. 숙제 검사를 하다가 글을 못 쓰는 학생이 한 마디라도 썼으면 나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웃는다. 거실에서 TV 보던 남편이 웬일인가 하고 방으로 달려왔다.

“혼자 손뼉 치며 왜 그래?”

나는 86세 된 학생이 글을 썼다고 자랑을 해 댄다. 마치 우리 아이가 초등생일 때 한 가지 발전하면 자랑하듯이.   

  

 칠판에 붙여 놓은 숙제 글을 읽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아기는 날개를 달고 무슨 놀이를 할까요너무 외로워 보이네요우리 손녀라면 할머 하고 놀면 좋겠다.”     

 

까르르 웃음이 멎은 다음 내가 쓴 답 글을 읽었다.

“아! 할머니가 손녀 생각이 나셨군요? 손녀가 외로워 보여 함께 놀아주고 싶은 따뜻한 할머니 마음씨가 너무 고우셔요. 예쁜 색칠과 글짓기 참 잘하셨어요.”

무작위로 칠판에 붙였는데 반장님 글이 1번이었다. 글은 도안 밑에 연필로 쓴 네 줄이 전부다. 짧은 네 줄로 학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번엔 맞춤법이 안 틀렸다 했더니  “~니”자를 빼고 “할머~”라고  씌어있다.

칠판에 틀린 단어를 적으면 곧바로 학생들이 다 맞혔다. 이제는 선생님 해도 될 것 같다고 칭찬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는가.

“글 다 쓰고 나서 천천히 읽어보시라고 했지요? 이거는 써 놓고 읽지 않아 틀린 겁니다.”     


 두 번째 그림은 혼자 사시며 농사짓는 88세 학생이다. 올해도 고추 농사를 짓는데 허리도 꼿꼿하다. 영특하고 그림 솜씨도 탁월하시다.

     

아가씨가 호화찰란 하게 차려입고 꽃향기를 맡으며 즐거워하고 있어요그런데 꼭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아요.”     

 

같은 도안의 그림인데 이렇게 표현이 다르다. 사람의 생김새도 다르듯 생각도 표현도 제각각이다. 답 글을 읽었다. 길게 쓰고 싶어도 쓸 자리가 없다. A4 용지에 그림 도안을 넣고 줄을 네 줄 정도 만들다 보니 더 쓰고 싶어도 자리가 없어 못 쓴다.

“어머나! 정말 호화찬란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네요. 정말 예뻐요. 꽃향기 맡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느낌이 저도 드네요. 너무 예뻐서 제가 갖고 싶어요. 잘하셨어요.”     

 

와! 맞춤법 틀린 곳이 딱 한 단어밖에 없다. 칠판에 틀린 단어 “호화찰란”을 판서하니 벌써 어디가 틀렸는지 금방 알아내는 학생이 있다. 이 글을 쓴 학생이 제일 먼저 답했다. 물론 모르는 학생도 있다. 나는 틀린 단어의 철자를 확실하게 알게 하려고 자음과 모음 자석 교구를 사용해 단어를 조합했다. 학생들에게 철자를 부르게 하고 자석 교구로 글자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다.     


 이번엔 치매가 약간 있는 85세 학생이다. 강아지 두 마리와 사는 학생이다. 무릎 수술도 하고 여러 군데가 아프시다. 그림과는 맞지 않는 내용이지만 썼다는 게 중요하다.   

  

산토 토기야어듸로 가르 깡깡  깡듯면서 어되로 가르야산토 토기야 듸르 가는 산토 토 어되로 가는야.”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5분 동안은 족히 웃었을 게다.

아파서 숙제는 안 하겠다던 학생이 이렇게 숙제를 하셨다. 나는 이 학생에게 매일매일 칭찬거리를 찾아내곤 했다. 오늘은 찾을 필요가 없다. 이렇게 잘 썼으니 말이다. 그것도 온 교실에 웃음을 선물했으니 얼마나 대견한(어르신에게 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일인가. 치매가 좋아진 것 같다. 기억을 되살려 산토끼 노래를 이만큼 적을 수 있으니 오늘은 두 배로 칭찬했다.

“산토끼 노래가 생각나셨군요? 어머! 기억력도 좋으셔요. 아기를 보니 옛 생각이 나셨나 봐요. 참 잘하셨어요.”

 다른 학생 모르게 이 학생 뒤로 가서 등을 쓰담쓰담 토닥토닥.     


이번엔 공부시작한 지 일 년 반 뒤에 입학한 86세 학생 차례다. 오일장마다 장사하러 다니느라 공부하는 날과 장날이 겹치면 결석했다. 요즈음 몸이 아픈 바람에 장사를 그만두고 공부하러 오신다. 아직 한글을 잘 익히지 못해 글로 표현하기 어려워했다. 한 줄만이라도 쓰는 연습을 해보라 했다. 그랬더니 숙제에 딱 한 줄 썼다. 검사할 때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한 생각이 났다.   

  

선생님 고맙씀니다.”     


 “제가 업어드리고 싶어요. 업어드릴까요?”

 나는 정말 업어드리고 싶었다. 교실 안이 웃음바다가 됐다. 86세에 생각을 글로 써 본 역사적인 날이다.

 두 단어 쓰기를 혼자 생각해 쓰는데 1년 넘게 걸렸다. 그런데 한 글자가 틀렸다. 그래도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 학생은 본인 이름을 ‘월’ 자로 알고 있었다. 나는 이상해서 주민등록증을 가져오게 했다. 역시 ‘월’이 아니고 ‘원’ 자였다. 84세에 온전한 이름을 알게 된 분이다. 맞춤법은 틀렸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 봤다는 것은 엄청난 발전이다.     


 “와아! 그림이 너무 예뻐서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아요. 이렇게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을 몰랐군요. 진작 학교에 다녔으면 화가 되었겠어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짝짝짝.”     

 이번엔 얼마 전에 대장암 수술하고 퇴원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공부하러 온 89세 학생 차례다. 머리가 좋고 센스도 넘치는 여자 노인회장님이다. 연세가 제일 높아도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신다. 스케치북에 스케치해서 그림도 잘 그리신다.     


 이 할머니의 증손자 이름은 김승우 8살인데 공부를 너무 잘해서 학원에서 영어를 5항년 형들보다 앞서 간다는데 고기잡이를 하는 너를 보니 조금은 걱정된다예뿌고 똑똑하니까 공부도 잘할 거야.”     


마음에 담긴 말을 글로 잘 표현하셨다. 두 글자가 틀렸지만 맞춤법이야 남들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으면 된다고 말씀드리고 답 글을 읽었다.     

 “증손자가 이렇게 예쁘고 잘 생겼대요? 너무 예쁜데 여덟 살이 5학년 형들보다 영어를 그렇게 잘한대요? 부러워요. 그런데 하루 고기 잡는다고 잘하던 영어를 못할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놀기도 해야 머리도 쉬죠. 그러면 공부 더 잘할 수 있어요.”


 맞춤법 틀린 부분을 칠판에 “5항년” 하고 판서 했다. 곧바로 ‘하’자에 기역 받침 해야 한다고 무엇을 틀렸는지 알아냈다.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다.  

   

“이거 공부할 때가 제일 재밌슈. 공부가 참 재미나유.”


 학생들은 공부할 때는 알겠는데 문밖에 나가면 다 잊어버린다고 하신다. 그렇지만 콩나물시루에 물 주면 물이 금방 쑥 빠져도 콩나물은 자라듯, 우리 학생들도 이렇게 하루하루 발전하는 걸 보면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행복하다. 어르신 문해 수업은 어느 일보다 보람 있어 열심히 하고 있다. 

글 몰라 고단한 삶이었을 이분들을 위하여.


-이글은 오마이 뉴스에 실렸던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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