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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자 Mar 29. 2023

89세 조교선생님과 함께 하는 마을한글학교

  2018년 1월, 시청에서 한글학교 신청이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다리던 일이라 내 가슴은 설레고 기뻤다. 남편은 이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다녀올 데가 있다고만 말하고 현장답사를 위해 집을 나섰다. 처음 가보는 동네라서 인터넷으로 버스노선과 위치를 파악하고 시내버스를 탔다. 정류장은 마을 슈퍼마켓 앞이었다. 살림집이 딸려있고 규모는 작았다. 미닫이로 된 가게 문을 두드려 인기척을 한 뒤 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주인아주머니에게 마을회관의 위치를 물었다.      


   수업할 장소인 마을회관은 큰 도로 옆으로 난 길의 모퉁이를 돌아서 가면 도보로 5분 정도 걸렸다. 장소는 확인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되돌아가는 버스를 타려면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버스시간표 상 30분이지 시골 버스는 5~10분 정도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 하필 그날은 그해 겨울 중 가장 추운 날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가겟집 말고는 사방이 허허벌판이었다. 물건도 사지 않으면서 일면식도 없는 시골 가게에 들어가 기다릴 수도 없고, 버스가 지나가면 언제 또 버스가 올지도 몰라 도로 가에 서 있는데 추위를 참기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복이라도 입고 올 것을. 코트를 입어 상의는 참을 만한데 다리가 몹시 추웠다. 기모바지라 따뜻할 거라 믿고 바지 하나만 달랑 입었더니 이대로 다리가 얼어버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언 다리는 몇 개월 동안이나 차디찬 냉기를 품고 있어 나를 힘들게 했다.     

 

  입학 날짜에 맞추어 수업준비를 했다. 화이트보드, 자음모음 합성표, 자음모음 자석교구, 8칸 국어노트, 마커펜, 색연필, 연필, 지우개, 필통, 교과서, 연필깎이 등을 구입했다. 문구점 사장님은 바빠서 배달이 어렵다고 했다. 사정을 해서 승용차에 싣지 못하는 화이트보드만 배달을 부탁했다. 나머지 물품들은 할 수없이 이 일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남편에게 부탁해 승용차로 날랐다.     


  마을회관은 남자어르신 방, 여자어르신 방으로 되어있고 여자어르신 방에는 주방이 딸려 있었다. 공부할 분들이 여자어르신들이라서 여자 방에 칠판을 달았다. 방의 크기는 일반 가정집 안방보다 약간 컸다. 학생 수는 19명이나 되었다. 교자상을 가운데 펴고 양쪽으로 앉으니 비좁았다. 내가 옆에 가서 지도하기가 불편했다. 학생 한 분이 건의를 하셨다.

  ”선생님, 남자 방은 넓어유, 노인회장님에게 말해서 방 좀 바꿔달라구 말 좀 해보슈.”

  나는 노인회장님에게 방을 바꿔 주십사 말씀드렸다. 

   “내가 바꿔주고 싶어도 동네 남자 노인들이 안 된대유. 절대로.”

  시골 마을은 어디를 가나 남자보다 여자분들이 더 많다. 여자의 수명이 길다는  것을 체감한다. 매일 이 마을회관에 오시는 남자분이 3~5명밖에 안 되고 여자는 19명이나 되는데 그것도 공부하는 날 만이라도 바꾸자는 데도 절대 불가란다. 왜일까?    

 

  학생의 나이는 75세부터 90세까지였다. 맨 앞쪽의 왼편엔 키가 크고 허리도 곧으신 89세 L학생 앉으셨다. 그 옆에 백발인 90세 S학생이 앉으셨다. 90세 S학생은 귀가 잘 안 들리고 89세 L학생은 청력에 문제가 없으시다. 90세 S학생은 선생의 말을 못 들으시니 가까이 가서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길 뿐 아니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 상황이 반복되자 89세 L학생이 90세 S학생에게 선생인 내 말을 듣고 그대로 옆에서 가르쳐 주셨다.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매 순간마다 통역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분에게 조교 선생님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90세 학생이

  “뭐라구? 뭐라구 했어?”

하면 89세 L학생이 얼른 그분의 귀에 가까이 대고 가르쳐 주어 수업이 매끄럽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아들이 듣지 못하니 공부하러 가지 말랴. 그런디 나 공부하러 오구 싶어유.” 

하루는 90세 S학생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글도 배우고, 치매예방에도 좋고, 혼자서 집에 계시면 우울할 수도 있으니까 기꺼이 오시라고 했다. 더군다나 조교선생님이 계시니 더욱 잘 되었다.     


  첫 수업은 연필 쥐는 법부터 시작해서 선 긋기를 한다. 농사일만 하다가 연필을 잡고 선 긋기를 하니까 삐뚤빼뚤 하니 제대로 그어지지 않는다. 

  처음으로 잡아보는 연필, 내가 앞에 가서 가르쳐 드리려 하면 연필 쥔 손이 덜덜 떨려 더 삐뚤어지고 만다. 그럴 때마다 난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니까 걱정 마시라고 한다. 선긋기를 배우고 난 후 자음모음을 가르치는데

“ㄱ” 자를 가르치려면 학생들 앞에서 뒤로 돌아선다. 그리고 

“자, 오른손을 머리 위로 높게 들어보세요. 저를 따라서 하십니다.”

이렇게 쓰는 순서와 방법을 따라 하게 한 다음, 노트에 쓰기를 한다. 이분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정은 대단하다. 


  일주일에 두 번 하루 두 시간씩 하는 수업이지만 농사를 짓느라 농사철엔 한 시간이 아까운 분들이다. 공부하는 날이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밭에 나가 그날 해야 할 일을 하고 오신다. 어느 분은 밭에서 일하다가 보면 공부할 시간이 다 되어 점심도 못 먹고 그냥 책가방만 들고 왔다고 하신다. 나는 수업하는 날이면 숙제를 꼭 내드린다. 이 분들은 숙제할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도 밤중이나 새벽에 시간을 내어 꼭 해 오신다. 학생들은 연세가 높지만 논농사  밭농사를 지으신다. 그래서 노인이라도 앉아서 쉴 틈이 없으시다.     


  “숙제는 오늘 배운 것 5번씩 써 오기입니다. 꼭 읽어가면서 쓰세요.”

  “다섯 번 들 쓰면 안 되남유?”

  “숙제는 제가 다섯 번 하라고 하지만 집에 일이 있거나 다른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안 해도 되고, 한 번만 쓰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열 번 쓰고 싶은 분은 열 번 쓰셔도 됩니다. 노트는 얼마든지 드립니다.”

  “숙제를 많이 하면 누구 공부가 될까요? 옆에 분 공부 해주는 걸까요? 

  “그야 숙제 한 사람 거 되것쥬.” 

  이 분들은 농사를 짓느라 일을 많이 해서 허리와 다리가 멀쩡한 분이 없다. 두 발로 걸어오는 분도 계시지만 노인보행기로 이동하는 분들이 많다. 걸음도 노인 보행기에 의지해야 하는데 농사일하면서 평생 못 배운 한을 풀러 오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에 대한 열정이 많아 16번, 10번씩 써오는 분도 계시다. 물론 2번 써오는 분도 있다.     


  “선생님! 왜 인제 왔슈? 진작 내 나이 젊은 날에 와서 가르쳐 주지유.”

  “내가 오늘 공부하러 올라구 새벽 4시에 일어나 밭에 갔는디 풀이 안 뵈는 거유. 그래서 더듬더듬 손으로 더듬어서 풀을 뽑았슈. 오늘 헐일 다 혀야 공부해도 맘이 편하쥬.”

  이분은 연세에 비해 허리가 너무 굽어 노인 보행기를 사용해야 이동이 가능한 분이다.      


  공부 시작하고 서너 달이 지났다. 이제부터는 출석을 부르는 대신 마을회관에 도착하는 대로 칠판에 본인 이름을 쓰게 했다. 어디 가서 본인이름도 떨지 않고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함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이름도 익힐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84세 되는 분이 누구한테 이름자를 배웠다고 칠판에  “김월례”라고 썼는데 아무래도 이름이 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다음에 공부하러 올 때 주민등록증을 가져오시라고 했다. 내 추측대로‘ 월’이 아니고 ‘원’ 자가 맞았다. 

  “세상에! 선생님 덕분에 80이 넘어서야 내 이름을 알게 됐네유. 고마워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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