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편지 한 장 받는 게 평생소원이던 남편에게
수업 시작한 지 15분쯤 되어서 K 학생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다. 하얀 블라우스의 등과 목덜미가 땀에 젖은 얼룩이 흡사 잘못 그려진 지도 같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서는 모양새가 늦지 않으려 서둘러 왔음을 알 수 있다.
"늦어서 죄송해유."
K 학생이 자리에 앉았다. 하던 수업을 마저 하고 쉬는 시간에 K 학생 자리로 갔다. 학교에 오려면 거리가 멀어 늘 일찍 오던 학생이 지각을 해 혹시 좋지 않은 일이라도 발생했는지 물었다.
언젠가 무릎 수술하고 보험금 신청하러 보험 회사에 갔을 때 겪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또 어려운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그땐 남편이 있어서 해결했지만 지금은 애들도 다 장성해 타지에서 살고, 남편도 유명을 달리해 혼자 생활하는 학생이다.
K 학생이 무릎 수술하고 보험금을 신청하러 보험 회사에 갔을 때 일이다. 남편 차는 트럭인데 주차할 곳도 없고, 또 보험금을 청구하려면 본인이 직접 와야 한대서 K 학생 혼자 4층 보험 회사 접수창구로 갔다. 직원은 서류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이름을 쓰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고.
접수 창구 직원에게 한글을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면서 쩔쩔매다가 남편에게 전화해서 서명한 뒤에야 보험금을 탈 수 있었다고 했다. 접수 창구 직원에게도, 남편에게도 그 창피함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도울 일이 있는지 물은 것이다. K 학생은 일각이 여삼추였을 그 순간 쥐구멍 있으면 들어갔을 거라고 했었다.
그 말을 듣던 L 학생이 그런 상황이 오면 자기가 썼던 좋은 묘책이 있다고 알려줬다. L 학생이 썼던 좋은 방법은 이거였다.
"그럴 땐 오른팔에 기부스하고 가유. 팔에 붕대를 감고 기부스 할 때 하는 팔걸이 사서 어깨에 두르고 가지. 난 두 개 은행에 통장을 만들고 돈이 필요해서 찾으려면 한 번은 이쪽 은행에서 찾고, 다음엔 저쪽 은행으로 가유. 은행 갈 때마다 기부스 하고 갔슈. 같은 은행으로 기부스 하고 가면 직원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두 은행을 이용해유. 은행 일 보려면 다쳐서 기부스 한 것처럼 하고 가서는 팔 다쳐서 이름 쓸 수 없다고 은행직원한테 써 달라고 했슈. 그러면 챙피 안 당하잖유."
가슴 저리도록 아픈 말이지만 K 학생에게 어려움이 생겼으면 L 학생 같은 기발한 지혜라도 발휘해야지 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내일이 남편 기일이라 제사 지낼 물건을 이것저것 구입하다 보니 늦었슈."
휴~ 다행이다. 두 번째 시간엔 오랫 만에 글쓰기를 해보기로 했다. 오늘 일기를 써도 좋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편지를 쓰거나 하고 싶은 말을 써보기로 했다. 무엇을 쓸지 모르겠으면 오늘 저녁에 어떤 반찬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써보라고 했다.
시간은 35분으로 정했다. 5분이 지나도 연필을 놓지 못하는 학생이 많다. 그땐 쓰는 것 중지하고 숙제로 낸다. 교과서를 옮겨 쓰는 것도 좋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써보는 것도 글자를 익히는 데 좋다.
학생들이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보면 글자를 쉽게 터득하던 경험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이 3분 정도 남았는데 오늘 지각한 K 학생이 제일 먼저 연필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다음은 K 학생의 편지다.
<나에게 편지 한 장 받는 게 평생소원이었던 당신>
당신 떠난 지 10년 만에 쓰는 편지임니다. 손이 떨리네요.
나에게 편지 한 장 바다보구 죽는 게 평생 소워니라구 한 당신.
이제서 당신 소원을 드러주네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 사라잇쓸 때 이렇게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앗슬까요.
당신이 하늘나라 간 지도 벌써 10년이 되엇네요.
당신이 그렇게 바다 보고 시픈 편지 한 장
그 소원을 못드러 주고 보내서 미안해요.
당신 소원 들어주려고 한글공부 하러 댕겨요.
무슨 말부터 써야 할까요.
당신이 가고 업는 지금, 애들은 다 시집 장가보냈어요.
다들 잘 살어요.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잘 보살펴 주구 있는 거지요.
고마워요. 앞으로도 애들 잘 보살펴 줘요.
내가 이름도 못써서 하늘 나라서 걱정 마니 하지요.
걱정허지 마라요. 지금은 학교 댕겨서 글자 아러요.
내일 당신 무덤에 이 편지 가지구 가서 일거 줄게요.
기다려요. 나 말이어요. 이제 글 물러서 고생 안 해요.
그러니 걱정 하지마러요. 보구 시퍼요. 당신 조아 하는 거 많이 가져갈께요.
내일 만나요.
놀랍게도 내용이 길었다. 그랬더니 내일 남편 묘지에 가 읽어주려고 집에서 이틀 전부터 어젯밤까지 쓴 편지라고 했다. 남편이 세상 뜨기 전 아내에게 편지 한 장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소원을 못 들어주었다고. 살아생전 남편 소원을 세상 뜬 지 10년 되어서야 편지를 써 보았는데 그 편지에 지금 또 덧붙여 썼단다.
그래서 편지 내용이 이렇게 길었다. 이 편지를 남편 무덤 앞에서 읽어주고 태우고 올 거라고 했다. 틀린 것 고쳐 달라고 가져왔는데 잘 되었다고 했다. 맞춤법 좀 틀렸으면 어떤가?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훌륭한 편지다. K 학생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내 눈가도 촉촉해졌다. 이러니 어찌 이 분들에게 하는 수업을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이글은 오마이뉴스에 발행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