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신행>을 보고... 대부분이 신랑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약속 시간에 마을 학교에 도착했다. 첫 수업은 김홍도의 <신행>이란 풍속도가 나오는 과목이다. 그림을 보자마자 학생들이 신행 그림이란 걸 금세 알아차렸다. 학생들이 어렸을 때 보아 왔던 모습이라 무엇을 그렸는지 아는 것이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 조선시대 후기 풍속화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 그림입니다. 1970년도에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된 <풍속도 화첩> 속 그림이구요. 이 풍속도 화첩에는 25점의 그림이 있다고 합니다. 이 <신행> 그림이 그 중 하나의 작품이고 수묵 담채화라고 합니다.”
수업해야 하는데 <신행> 그림을 보더니 예전 혼례식 생각이 나서 너도나도 당신들 결혼식 때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그래서 잠깐 학생들이 결혼식 했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 학생들 연배에는 신붓집 대청이나 안마당에서 초례청을 만들고 결혼식을 올렸다. 신붓집에서 혼례식을 하면 신부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간 사람도 있고, 당일 신랑집으로 가기도 했다. 신부는 혼수와 함께 트럭 타고 시집온 학생이 많았다. 결혼식 하고 트럭으로 신랑집에 가지만 대개의 시골집들은 좁은길을 지나서 위치해 있다. 그래서 신랑 집까지 가려면 트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 성인 문해 교과서에 실린 김홍도의 <신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이렇게 신랑 집에 도착하면 신부는 신부 놀음(새댁 노릇 :저녁때까지 방석을 깔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으면 신랑 집 친지나 동네 사람들이 신부 구경을 함)을 하루 동안 하거나 사흘 동안 했다.
그런데 이 학생들은 결혼식 올리기 전에 신랑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다. 중매쟁이가 중매해서 부모가 혼인할 것을 결정하고 날을 잡아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신랑 얼굴은 결혼식 하는 초례청에서 처음 본 학생이 많았다. 초례청은 대개 신붓집 마당이나 대청에 차리기 때문에 신랑·신부 맞절할 때 신랑 얼굴이 궁금해 아주 잠깐 몰래 보았다고 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차마 그렇게도 보지 못하고 첫날밤에 처음 본 학생도 있었다.
그때 처음 본 신랑이 마음에 들었느냐고 물어보았다. C 학생이 재빨리 대답했다.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결정해서 결혼식까지 올렸는데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느냐고 해서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J 학생이 말을 이어 나갔다. 초례청에서 맞절할 때 안보는 척하면서 신랑 얼굴을 살짝 보았는데 신랑이 너무 예쁘게 생겼더라고 했다. 살면서도 신랑이 예뻐 자꾸 보고 싶었다. 일하다가도 신랑이 보고 싶고, 방에서 바느질하다가도 신랑이 보고 싶어 부모님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몰래 문틈으로 보았다고 했다. 부엌에서 밥하다가도 신랑이 보고 싶어 자꾸 쳐다보았다. 볼수록 예뻤다. 그렇게 그때는 신랑이 예뻐 보였다고.
CH 학생이 말을 이어 나갔다. 얼굴도 자세히 보지 못한 낯선 신랑이 첫날 밤에 본관은 어디냐 묻고, 아버지 어머니 함자도 물어보면서 사자성어를 섞어 질문을 많이 했다. 그렇게 아는 것도 많아 보이고 인물도 번듯한데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CH 학생이 화장품 장사해서 애들 키우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글을 모르는 상태로 장사를 하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그러자 W 학생이 말했다.
“내 얘기 좀 들어봐유. 어머니가 맨 처음 오빠를 낳고 딸 열 명을 낳았지 뭐유. 내가 맏딸이유. 시누이가 열명이나 되니 누가 딸을 주겄슈. 중매가 들어오면 시누이가 많아 시누이 시집살이한다고 혼인을 못 하는 거유. 그래서 오빠는 하는 수 없이 동네에서 겹사돈하기로 약속하고 결혼했다니께유. 사돈될 집에서 딸을 우리 집 며느리 삼는 대신 우리 부모님도 딸 하나를 그 집 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속을 하고 겨우 장가든 사람이 우리 오빠유.”
그런데 그런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데 올케가 아이를 낳아서 결혼식을 집에서 못 올리게 되었다. 그 시절엔 아기 낳고 삼칠일 전에는 부정 탄다고 외간 사람을 집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신붓집에서 초례청을 만들고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데 올케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결혼식 날 당진군 대호지면 출포리에서 첫새벽에 새신부가 신랑 집으로 출발하여 당진군 당진면 사기소1리(현재 당진시 당진 2동 사기소 1리)까지 약 17km를 걸어서 신랑 집을 향해 갔다.
혼수는 사람이 등에 지고 갔다. 중간쯤에 중매쟁이가 마중 나와 함께 걸어갔다. 신부는 걸어오면서 중매쟁이에게 신랑이 집에 있을까 하고 물어보았다. 결혼식을 신붓집에서 못 하겠으니, 오지 말라고 해서 마음이 상했을까 걱정 되었다, 혹시 도망가지나 않았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늦은 아침녘이 되어서야 신랑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신랑은 집에 있었다. 마당에서 혼례를 거행하는데 그때 처음 신랑 얼굴을 살짝 훔쳐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제 와서 어떻게도 할 수 없어, 그냥 살았다. 아니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시집을 왔는데 신랑 집은 넉넉지 않았다. W 학생도 형제가 11남매나 되니 시골에서 학교는 꿈도 못 꾸었다. 글도 숫자도 몰라 불안했으나 장사를 해보기로 했다. 어떻게 장사를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그렇지만 애들을 가르치고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장 좌판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글도 모르고 계산도 제대로 못 해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할 때도 많았다.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고 갚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물건 떼 온 원금을 주고 나면 이윤이 없는 날도 있었다. 이 모두가 다 못 배운 탓이라 생각되어 가슴을 탕탕 쳤다. 이럴 때마다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나처럼 되지 않게 아이들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가르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장사했다. 그렇게 해서 자식 4남매 가르치고 결혼시켰다.
86세 나이에도 장날마다 좌판에서 장사했다. 2년 전 폐암 수술을 하고도 장사를 했는데 2023년 초부터 몸이 자꾸 아파 2월부터 장사를 중단했다. 죽기 전에 한글 아는 것이 소원인 W 학생은 요즈음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다. 이야기를 서둘러 끝내고 나서 W 학생이 말했다.
“선생님, 나 한글 술술 읽고, 하고 싶은 말 편지로 쓸 수 있을 때까지 가르쳐 주실 거지유? 장사 할 때 글 몰라 답답하고 손해도 봤지만 무시당한 거, 말로 다 못해유 . 그래서 내 소원이 한글 알고 죽는 거여유.”
김홍도의 <신행> 사진 한 장 덕분에 학생들 결혼식 올린 이야기를 듣다가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잠시 옛 추억으로 이 분들이 행복했으니, 그도 좋은 일 아닐까?
" 오늘 숙제는 지금 했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만큼 글로 써오기 입니다."
-이글은 오마이 뉴스에 발행된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