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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자 Apr 21. 2023

진작 배웠음 화가 됐을 거야

당진의 모지스 할머니

마을 학교에서 만난 어르신 중에 연세가 높아도 세상물정을 훤히 꿰는 분이 있다. 정정해서 89세라고 믿기 어려운 분이다. 머리회전도 빠르고 애교도 있으시다. 그런데 올해 1월 달에 읍내 병원에서 장내시경 결과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손자의 발 빠른 주선으로 판정 2주 만에 서울 모대학병원에서 수술날짜를 받았다. 검정 바탕에 노랑과 갈색 꽃무늬 롱 원피스를 입고 마을학교 수업 날 공부하러 오셨다.   

   

“선생님! 수술하게 되어서 학교 한 달만 학교 빠질게 유.”


학교를 결석하게 되면 꼭 전화를 주는 분인데 공부하러 와서 말씀하셨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그렇게 하라고 말씀드렸다. 요즘은 의술이 좋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로 위로해 드렸다. 이 상황에 학교에 와서 공부할 걱정을 하다니, 공부가 뭐라고. 


그런데 속으로는 저 연세에 암수술을 받고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걱정하는 나와는 달리 학생의 긍정적인 모습에 놀랐다. 수술하고 나서 한 달만 되면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확고하셨다. 나는 또 한 분을 잃게 되면 어쩌나 마음이 가라앉았다. 정정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가신 분이 두 분이나 있기 때문이다. 가슴에 쇳덩이 하나 매단 기분이다.  

   

어르신 수업은 보람 있는 일이기는 하나 시간이 지나다 보면 치매가 발병하기도 하고, 입원도 하신다. 장기 결석을 하면 요양원에 가는 분도 생긴다. 또 갑자기 돌아가시기도 한다. 이럴 때 내 마음은 한 여름 소낙비 오기 직전 먹구름 하늘이 된다.  

    

이 학생이 퇴원한 지 18일 만에 정말로 학교에 오셨다. 입원 중일 때 통화는 했지만 이렇게 공부하러 오실 줄은 몰랐다. 얼마나 반가운지 두 손을 잡고 흔들며 펄쩍펄쩍 뛰었다. 얼굴색은 예전 같지 않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신다. 이런 정신력을 가지고 계시니까 자식들을 모두 당신이 벌어 학교에 보내셨을 게다.      


 나는 하루 만보는커녕 2000보 걷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 학생은 퇴원해 집에 온 후 하루 만보씩 걷는다고 하셨다. 딸들과 내기를 걸었다. 그래서 하루에 꼭 만보를 걷는다. 딸들이 엄마 건강을 위해 내기를 만든 것이다. 그것도 돈내기. 


학교도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 숙제도 꼭 해 오신다. 학생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숙제로 받는 그림 도안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 넣어 같은 도안이라도 이 학생 그림이 풍성하다.   꽃이나 새 등 한두 가지씩 덧 그려 다른 학생 그림 보다 특성이 있다. 맞춤법은 틀리지만 글 솜씨도 재치가 있으시다. 학생의 글을 읽다 보면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 생동감이 있다. 글이  생선으로 치면 살아있는 생선이랄까.    

 

이뿐만 아니라 노인일자리도 하신다. 어떻게 든 움직이고 배우고 하신다. 저녁에 잠이 안 오면 숙제도 하고 그림을 그린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암에 걸렸다고 하면 이 학생처럼 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어르신들은 자식이 돌보지 않는다고, 찾아오지 않는다고 원망으로 사는 분들도 많은데 이 학생은 그렇지 않다. 여든아홉 연세에 식사도 혼자 해 드신다. 물론 반찬거리 나 과일 등은 자식들이 가져오거나 택배로 보내기도 한다. 자식에게도 이웃에게도 감사할 줄 아는 정신건강까지 아주 건강한 학생이다. 본받고 싶은 분이다. 

     

나는 마을학교에서 한글수업만 하면 지루할 것 같았다. 어떤 수업을 하면 학생들이 재미있을까 궁리했다. 생각 끝에 치매예방에도 좋은 미술을 해보면 좋은 것 같아 색칠 공부를 가끔씩 했다. 색칠한 것을 칠판에 붙여놓고 색깔의 이름도 가르쳐 드렸다.  한결같이 대부분의 학생들이 파란색과 초록색, 연두색 구별을 못하셨다. 초록색도 파란색, 연두색도 파란색, 파란색도 파란색이라고 하신다. 색칠 공부 하는 시간마다 색의 이름을 반복해 알려 드렸다. 그리고 도안을 열심히 인쇄해 지도했다. 재미있어하셨다. 80 평생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 본다며 좋아하셨다.   

  

그러다가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는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처음엔 어떻게 글자를 쓸지 몰라 못 한다고 도리질을 했다. 그런데 차차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그림에 어울리는 글짓기 실력이 붙기 시작하더니 재미있어하셨다.    

 

 어느 날 이 학생의 집에 손주가 다니러 왔다가 할머니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할머니 진작 어릴 때 학교 다녔으면 화가 됐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간 손주가 다음에 올 때 미술재료와 그림책을 한 아름 사 가지고 할머니께 선물하고 갔다. 신바람이 났다. 이 학생은 재료도 많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니까 틈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밤에 잠 안 올 때 그림을 그리면 시간 가는 줄 몰라 좋다고 하셨다. 


학생이 그림을 접해 본 것은 한글학교에서 그림도안에 색칠해 본 것이 전부다. 그림이 아주 훌륭하다. 아마도 제 때 학교에 다녔다면 화가가 되지 않았을까. 학생의 그림은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림을 배운 적 없고 연세가 90이 다 되신 분이 이 정도 그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기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이 분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미국에 모지스할머니가 있다면 이 학생은 당진의 모지스 할머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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