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다음 계절을 마중 나가는 일

그 불가항력적인 소멸에 대하여

by 김여호
봄날은 간다, 약속이 식어서가 아니라 계절이 제 몫을 다했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사랑이 변하는 것을 두고 ‘식었다’는 표현을 쓴다. 온도의 하강, 뜨거웠던 열기가 식어 비릿한 냉기만 남은 상태.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깨닫게 된다. 사랑이 끝나는 건 누군가 약속을 어겼거나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라, 그 사랑에 허락된 ‘계절의 할당량’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은수가 내뱉은 “라면 먹을래요?”라는 문장은 한때 가장 따뜻한 초대였지만, 시간이 흐른 뒤엔 그저 배고픔을 달래는 건조한 수사가 된다. 상우가 울먹이며 묻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질문은 사실 틀렸다. 사랑이 변한 게 아니라, 봄이 제 몫을 다하고 다음 계절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뿐이다. 억지로 붙잡으려 해도 벚꽃은 지고, 녹음은 짙어지며, 결국 찬바람이 부는 법이니까.




영화의 끝에서 상우는 다시 소리를 녹음한다. 예전처럼 누군가와 함께 보폭을 맞추는 대신, 홀로 서서 바람의 결을 듣는다. 그는 이제 안다. 봄날은 간다. 그건 누군가의 배신 때문도, 의지의 부족 때문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그 계절을 남김없이 통과했기 때문이며,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소멸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지나간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 계절을 온몸으로 앓아본 사람의 손바닥에는 사라진 줄 알았던 봄의 비릿한 향기가 아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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