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고생스럽고 선명하게 함께한 기억

by 이정


‘그때 우리 참 재밌었지’라며 오랜만에 연락 온 동료의 메시지를 받았다. 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하나같이 그때는 고생스럽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다. 장애청년과 동네 경로당 어르신들의 생신잔치를 해드린다고 무거운 과일을 들고 허둥댔던 기억, 텃밭 키워서 혼자 살고 계신 당사자와 나눠먹겠다고 화분 들고 옥탑방을 후들거리며 올라가던 기억, 임신한 배를 붙잡고 어린이집에 ‘나눔교육'을 하겠다고 동네 구석구석 어린이집을 찾아다니던 기억, 캠핑하겠다고 리어카에 살림살이를 바리바리 싸가지고 신나 하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고생스럽지만 그렇게 애쓰는 동안 장애당사자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이웃’이 될 수 있었고, 도와주는 데만 익숙했던 자원활동가들은 장애당사자의 역할을 수용할 수 있었다.

우리 지역에서는 장애인도 이웃으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복지관 건물 안에서 일주일 꽉 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시설 같이 느껴졌다. 장애청년들이 짜여진 활동에 맡겨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동네에서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며 이웃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그러려면 장애당사자와 함께 의논하면서 끊임없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시간과 동네에서 함께 살아본 경험이 필요했다. 그래서 참여하는 장애당사자뿐 아니라, 다른 팀의 동료, 마당발인 자원활동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함께 다니는 부모, 마을활동가들과 만나는 일들이 잦았다. 협력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다 보니 장애당사자가 복지관 프로그램실이 아니라 동네 카페에서 취미활동을 하기도 하고, 동네 텃밭에서 텃밭활동가들과 함께 작물을 가꾸거나 산책길의 쓰레기를 함께 줍는 활동이 시작됐다. 장애청년들은 캠핑장을 대여해서 음식도 해 먹고 추억을 만들고 싶다며 ‘집 나서면 개고생’이라는 활동 이름을 지었다.

복지관에서 일하면서는 장애청년이 다닐 수 있는 대학강의수업을 지역사회 곳곳에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지역사회 대학과 협력해서 장애청년들이 대학교나 평생학습관에 가서 일부 강의를 청강하기도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관련된 경험을 할 수 있는 학습지를 동네 곳곳에 만들고 싶었다. 장애청년들이 공동체로 일하면서 고정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사업처도 운영하고 싶었다. 우리는 복지관을 매개로 만났지만 함께 꿈을 꾸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즐거운 추억을 남긴 것 같다. 고생스러웠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기억들을 떠올려보면 힘든 순간이 와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래서 그런가 활동가로서 단체에 들어오기 전에도 급여, 활동내용 같은 당연히 궁금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묻지 않았으면서도 동료 활동가에게 요청했던 것은 ‘장애당사자와 함께하는 일들이 있었으면 한다’는 딱 하나였다. 그 힘과 경험이 있어야 활동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을 시설에서 머물다 나온 장애당사자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잘 몰랐다. 그저 탈시설한 후에 펼쳐지는 소중한 생애를 함께 맞이할 수 있다는 것에 설레고, 혼자가 아니라 세상에 함께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동료에게 한 하나의 부탁은 잘 지켜지고 있다. 장애단체 활동가로 살다 보면 장애당사자를 만나는 일이 다반사기도 하지만, 동료로서 함께 일하는 순간들이 많다. 탈시설 정책을 만들어가거나 과거 시설수용 의제를 사회로 확산해 가면서 탈시설당사자의 삶의 경험과 요구들은 원동력이 된다. 바쁘고 빠른 속도와 의제의 난해함 속에서 서로의 손을 놓치게 되는 순간들이 올지 모르나, 우리는 또 고생스럽고 선명한 기억들을 만들어가며 그 장면 속에서 버티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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