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목욕탕을 리모델링한 서귀포의 복합문화공간 갤러리
‘라바르’는 서귀포시 서귀동 이중섭거리 근처에 있는 복합문화공간입니다.
1층은 대로변에 있는 카페로 운영되고 있지만 미리 알고 찾아간 분이 아니라면 길 가다가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듯한데요, 일반적인 카페와 달리 라바르에는 눈에 띄는 간판이 없고 안쪽의 공간이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었거든요.
아마도 눈썰미가 예리한 분이라면 외벽 한쪽에 붙어있는 ‘옛 온천탕’이라고 적혀있는 은색 금속판을 눈여겨볼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CAFFEE, DESERT라는 글자만 써 놓은 입간판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정면 유리에 ‘순간이동’이라고 붙어있는 글자를 흘낏 본다면 호기심을 못 이기고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볼 지도요.
1층 정면의 대부분은 시커먼 대리석 벽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서 벽을 따라 이동한 다음에야 왼쪽에 난 입구로 들어갈 수 있는데요, 미로처럼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면 카페 공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확 트인 공간에서 맨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바닥의 동그란 욕조입니다.
실내 중앙에 있는 은색 테이블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욕조로 떨어지는데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소리는 명상음악 같기도 하고 우주의 씨앗 소리라는 만트라 같기도 합니다.
1층과 3층 공간을 카페로 운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정체성이 카페가 아닌 ‘복합문화공간’인 이유는 라바르의 운영자 박재완 대표의 의지 때문입니다.
박 대표는 현재의 라바르 자리에 있던 대중목욕탕을 3대째 경영해 오던 목욕탕집 손자입니다. 초등학생 때는 할머니를 도와서 가끔씩 목욕탕 입구 의자에 앉아 플라스틱 바구니에 요금을 받았다고도 해요.
사십여 년 전 목욕탕은 동네 사람들이 뜨끈하게 탕욕을 하면서 기분전환하는 공간이자 경조사에 대하여 수다 떨면서 풀어내는 커뮤니티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주택의 냉난방과 온수설비가 현대화되면서 대중목욕탕을 찾는 사람들은 뜸해졌고 건물도 낡아 갔지만 박 대표는 이 공간을 단순히 월세 받는 상가건물로 탈바꿈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옛 목욕탕 건물의 3층 주택에서 나고 자라서 사십여 년 이상 거주했던 박 대표는 건물 뼈대만 남기고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던 날에도, 행위예술 하는 현대 무용가를 초청하여 흰 옷자락 휘날리는 춤사위로 옛 목욕탕과 작별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해요.
라바르의 독특한 출입문은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재현해서 만들었습니다.
1층 카페의 욕조는 여탕에서 쓰이던 것을 그대로 보존했으며 3층 테라스로 나가면 온천탕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붉은색의 커다란 굴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몸을 씻는 공간에서 마음을 씻는 공간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건 라바르는 2층 상설전시공간 갤러리 뮤즈를 중심으로 1층 카페 공간과 3층 공간 모두가 일회성 소비가 아니라 서귀포에 거주하거나 여행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문화를 접하고 대화를 나누며 교류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기획되었습니다.
라바르 2층 갤러리 뮤즈에서는 2023년 아홉 번의 전시가 열렸는데요,
1월 개관전시 <우리 같이> 김주희 개인전을 필두로 <Sweet, Blue Feeling> 강수희 작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극장> 최용호 그림책 작가 원화전시, <Muse, Sing My Persona> 유규 작가, <경계> 장영 작가 등 주로 제주도에서 작업하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후원하였습니다.
9월에는 제주 전역에서 개최되었던 <2023 아트트랙 제주>의 일환으로 헤르시와 조이유의 전시가 열리기도 했어요.
2021~2022년 코로나로 인해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되었던 시절, 영국의 젊은 일러스트레이터 조이유 작가는 구글맵으로 제주도의 거리와 풍경을 보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바다에서 걸어 나온 해녀들의 모습, 감귤을 파는 상점,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카페 안 사람들, 절벽 앞의 바다에 누워서 배영을 하는 여성을 오일파스텔과 수채화 물감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지요.
<2023 아트트랙 제주> 전시 마지막 날, 런던에서 온 조이유 작가는 라바르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아티스트 토크를 가졌습니다.
라바르 3층은 낮에는 카페, 저녁에는 와인바로 운영됩니다. 아티스트 토크가 끝난 직후 이곳에서 조이유 작가의 원데이 드로잉 클래스가 열렸습니다.
해가 저문 후 서귀포의 야경을 장식하는 새연교가 보이는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조이유 작가가 먼저 색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붓펜에 수채화 물감을 찍어서 채색을 하는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학창 시절 이후로 그림이라곤 그려 본 적 없는 관람객들도 진지한 분위기에 휩싸여서 저마다 그림에 열중했습니다. 아늑한 부분 조명이 실내를 은은히 밝혔고 박재완 대표가 건네준 레드와인을 홀짝이다 보니까 평소보다 과감해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휴대폰에 간직한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제주도 풍경화 한 장을 완성한 사람들은 창작의 기쁨에 벅찬 소감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라바르 3층에서는 요가, 드로잉, 와인 등 다양한 일일 클래스가 종종 개최됩니다. 그중 일부는 지자체의 후원을 받아서 제주도민뿐 아니라 여행자들에게까지 무료로 개방되고요.
사실은 저도 라바르에서 열린 원데이 사진 클래스를 수강했다가 대표님과 안면을 트면서 <서귀포 중앙동 마을 아카이브>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갤러리 뮤즈에 사진 몇 점을 출품한 적도 있었답니다.
제주도를 혼자 여행한다면 서귀포 시청 인근에서 며칠 묵어가는 걸 추천합니다. 유서 깊은 대형 호텔들이 많으며 비수기에는 가격도 깜짝 놀랄 만큼 저렴하거든요.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제주도 특급호텔에서 일했던 셰프들이 차린 음식점도 있고 안주가 맛있는 술집들도 많고요.
이중섭 거리에 위치한 신신호텔도 추천할만한데요, 베이지색 건물벽이 이탈리아의 우아한 빌라를 연상하게 하는 신신호텔은 연식이 꽤나 오래된 대신에 객실이 널찍하고 커다란 창이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라바르는 휴일 없이 오전 아홉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영업하므로 호텔 부대시설처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라바르 1층 노란색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따듯한 롱블랙 한 잔에 구운 가지 프로슈터로 브런치를 해결하고 2층 갤러리에 들락거리다가 3층으로 올라가서 책을 읽거나 노트북 작업을 하고 늦은 밤에는 새연교 야경을 바라보면서 와인 한 잔 마셔도 괜찮겠지요.
실내에만 있기 답답하다면 이중섭 거리에서 자구리 해변공원까지 서귀포 시내를 산책해도 좋을 거 같고 하루쯤은 호텔에서 푹 쉬다가 해질 무렵 라바르에서 열리는 요가 클래스에 참가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P.S. 2023년 9월 <아트트랙 제주> 전시가 끝난 후에도 라바르 2층 갤러리 뮤즈에서는 <사소한 틈의 조각들> 일러스트레이터 Nal, <Stand by me> 일러스트레이터 클로이 등 전시가 끊일 날이 없었다고 하네요.
전시 소식은 라바르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lavarr.jeju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갤러리 뮤즈에서는 사진작가 임하람 개인전 "ME:완성"이 4월 9일(화)까지 진행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