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한 사업가인 큰아버지와 외동딸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큰어머니는 언니가 데려온 남자가 여섯 살 연하의 무명 화가라는 데 적잖이 실망했다. 그래도 겉으로는 억지로나마 자식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록 언니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외아들인 수영의 부모님이 두 분 다 의사인 데다가 페이닥터를 여러 명 고용한 규모 있는 병원을 운영한다는 사실도 얼마쯤 작용했는지도 몰랐다.
뻣뻣한 새 양복이 무척 불편한 듯 고개도 자세도 삐뚜름한 채로 록 언니를 대동하고 걸어오던 수영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우리는 둘 다 깜짝 놀랐다. 길게 자란 앞머리에 가린 그의 가느스름한 눈이 당혹감으로 번쩍거렸던 걸 나는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수영과 나는 미리 짜놓기라도 한 것처럼 시치미를 뚝 뗐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그의 마음과 내 마음이 유리 한 장 사이를 두고 마주 보는 것처럼 투명했다. 상견례장에서 예비형부와 예비 처제로 만난 수영과 나는 둘 다 테이블만 끝도 없이 쳐다보면서 어색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큰어머니와 큰아버지는 번갈아 가면서 자식 자랑을 한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말끝마다 이렇게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할 줄 몰랐다며 한숨을 쉬는 큰아버지 부부와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어색했던 수영의 아버지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D대학 미대라면 수영이랑 동창인데, 아는 사이냐.
나는 애매하게 웃으면서 그렇다고 했다.
- 둘이 친했어?
그의 아버지가 호기심을 보이자마자 뭔가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것처럼 눈초리를 모로 세운 수영의 어머니가 냉큼 끼어들었다. 얘가 누구랑 친하고 자시고 할 성격이냐고. 선을 긋는 의도는 분명했다. 넝쿨째 굴러온 복덩이 며느릿감을 코앞에서 놓칠 수 없다는.
예비 시어머니가 내 아들이랑 어떻게 만났냐고 눈웃음을 치면서 묻자 록 언니는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오는 해님처럼 환하디 환하게 웃었다. 테이블 사이를 지나면서 서빙을 하던 웨이터가 무심코 돌아볼 정도였다.
- 운명이었죠.
언니는 고개를 푹 수그린 수영에게 바짝 기대앉아서 다정하게 그의 팔을 끼고 손깍지를 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