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난관 : 짐 싸기

해외여행 가방을 싸기에는 너무도 빈곤한 상상력

by 유랑

막막하기만 했던 짐 싸기.

환전을 얼마나 할까 끙끙대면서 예산을 짜고 나자, 뭘 가져갈지 어렴풋이나마 윤곽이 잡혔다.




일단 리조트에서 수영을 해야 했으니까 수영복과 물안경이 필요했다. 스노클링을 하기로 했으므로 래시가드와 워터레깅스도 필요했다.

세면도구를 챙기고 갈아입을 옷도 챙겼다. 한두 벌만 있으면 될 거 같았지만 여름옷이라서 부피도 크지 않고 배낭 메고 가는 여행도 아니니까 기분 따라 입으려고 원피스 두 벌과 반바지, 얇은 점퍼를 더 챙겼다.


인천공항까지는 흰색 반팔티에 청바지, 운동화를 신고 가기로 했다. 그러자 비로소 여행 떠나는 기분이 났다.

배낭에 노트북과 다이어리, 보조배터리와 충전기, 책도 세 권 챙겼다. 밀리의 서재 앱에도 전자책을 몇 권 다운로드 해놓았다. 종이책을 얼마나 읽을지 상상이 안 갔지만 소설 한 권, 산티아고 여행기 한 권, 마음 챙김 에세이 등 세 권은 있어야 될 거 같았다.


- 비행기에서는 뭘 하지?

- 거기 도착해서도 혼자서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으면 어쩌나.

무선 이어폰을 챙기고 쿠팡 플레이에서 영화도 몇 편 다운로드했다.

샌들과 크록스, 아쿠아슈즈를 비닐에 싸서 넣고 선크림과 선글라스, 모기약, 맥가이버칼도 챙겼다. 오리발과 스노클도 가져가고 싶었는데, 기내용 트렁크에 더 이상 남은 자리가 없었다.


혼자라는 사실이 신경 쓰였고 불안했는데도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던 건 리조트 객실이 바로 수영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 정 할 일 없으면 수영이나 하지 뭐.

가고 싶지 않다는, 또는 도저히 혼자서는 못 가겠다고 절망감이 밀려올 때마다 수영장을 떠올렸다.

나는 일 년 육 개월째 수영강습을 받고 있었고 자유형, 배영, 평영은 할 줄 알았다. 접영은 아직 못했다. 수영할 때는 팔다리 움직이는 것 외에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침에 눈 뜨고 바로 수영장에 나간다면 나와는 다른 사람이, 자유로운 여행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날 저물고 나서도 수영하고, 밤에 잠들기 전에도 또 수영을 해야지.


실제로 수영장과 연결된 객실에 나흘간 머무르면서 수영장엔 겨우 두세 번밖에 안 들어갔다.

하지만 리조트 창가로 테이블을 옮겨놓고 수영장을 바라보며 일기를 썼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하늘색 물결을 쳐다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기도 했다.

오랜만에 쓰는 일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밤 아홉 시까지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었는데, 여덟 시엔 유리문을 열고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도 일기를 쓰다 보면 번번이 그 시간을 넘기고야 말았다.


환전해 간 돈은 거의 다 쓰고 왔다. 보홀의 상점 대부분은 신용카드를 받지 않았다. 마지막 날 저녁식사는 현금이 부족해서 신용카드가 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해결해야 했다.

오천페소는 빠듯했고 이백달러에서 사십 불 정도 남았다. 신용카드로도 오만 원은 썼으므로 물가 싸다는 필리핀에서 나흘간 용돈을 사십만 원이나 쓴 거였다.




내 경우엔 돈을 써서 후회한 적보다 안 써서 후회한 적이 더 많았다.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도 스크루지처럼 남에게도 나에게도 베풀 줄 모르고 살았다.

예상했던 맥시멈 비용 사십만 원을 거의 다 써 버린 건 이혼하고 여행 가서 잘한 일 중 하나였다.

나중에 다시 쓰겠지만 달러 남은 돈도 다 쓰고 왔으면 더욱 후련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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