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난관 : 로밍, 환전, 이 트래블 작성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고 나는 중년이 되어있었다

by 유랑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깊은 한숨만 푹푹 나왔다.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거실 한복판에는 쫙 벌린 여행용 캐리어가 널브러져 있었다. 가져갈 짐을 다 싸야만 했고, 그러려면 생각이란 걸 해야만 했다.




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노트북과 휴대폰 화면을 번갈아 노려보며 씨름하는 중이었다.

옷가지 한두 벌과 세면도구만 챙기면 끝인 국내여행과 달리 해외여행 가려면 일단 환전과 로밍을 해야 했다.

거기에 하나 더, 필리핀에 가려면 ‘이 트래블’이라는 걸 미리 작성해야 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샘플을 뒤져보며 하나하나 기입을 했다. 하지만 대체 뭘 잘못했는지 화면이 다음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여행사 직원은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고,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작성해도 된다고 태평하게 말했다. 정 어렵다면 오천 원만 내면 대행도 해 준다고.

파파할머니도 아닌데 여행신고서 작성을 돈 내고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까짓 거 하나 못하면서 해외여행을 어떻게 간단 말인가.

두 시간 가까이 끙끙대다가, 뒤늦게야 사진을 업로드하는 란을 발견하고 겨우 등록을 마쳤다.


로밍도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유심이 아니라 이심이라는 걸 구입해서 등록하면 된다는데 뭐가 뭔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해외여행 나가본 지 팔 년 사이에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배낭 하나 메고 유럽까지도 잘만 갔던 젊은 날과 다르게 나는 머리도 굳고 이해력이 떨어진 중년이 되어있었다.

쿠팡에서 발견한 이심판매자는 친절했다.

전화로 문의했더니 유심칩을 넣어야 했던 예전 방식과 달리 큐알코드로 인식만 하면 되는 이심은 오류가 날 일이 없다며 안심시켜 주었다.

결제하고 나서 십 분도 안 돼서 이심 큐알코드가 메일로 날아왔다. 데이터를 하루 3GB씩 나흘 동안 사용할 수 있는 필리핀 이심 가격은 오천 칠십 원.

객실에서 와이파이가 안 터져서 데이터를 아무리 써대더라도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았다. 만약에 부족하다면 필리핀에서 인터넷으로 하나 더 구입해서 바로 등록하면 되는 거니까.


세 번째 난관은 환전이었다.

혼자 가서 뭘 하고 놀 건지 알아야 얼마를 쓸 건지 감이 올 텐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해외여행 다녀왔을 때마다 남은 외화를 넣어둔 지갑을 열어봤더니 위안화, 유로, 엔화, 심지어는 신혼여행지였던 뉴질랜드 지폐까지 몇 장 나왔다. 달러도 세보니까 백 달러 정도 있었다. 여행 싫어하는 그를 어르고 달래서 해외여행을 잘도 떠났고, 다녀왔을 때마다 또 갈 거라면서 남은 지폐를 모아뒀던 거였다.


필리핀 페소는 국내 환전 수수료가 높으므로 달러로 가져가서 현지 환전소를 이용하는 게 낫다고들 했다. 나는 패키지로 여행을 가는데, 환전소에는 언제 어떻게 무슨 돈으로 갈지 상상도 안 갔다.

은행 앱으로 환전해서 공항에서 찾으면 환율 우대를 해준다는 블로그를 보고 페소환전과 달러환전 차이가 얼마인지 인터넷을 꼼꼼히 뒤져가며 확인을 했다.

필리핀 현지 환전소 시세는 1달러에 55~56페소. 국내에서 원화를 페소로 환전하면 5% 정도 불리했다.

커피 한 잔값 날리는 셈 치고 당장 쓸 필리핀화 오백페소와 미화 백 달러를 환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지고 있던 달러를 합치면 이백달러와 오천페소, 우리 돈으로 사십여만 원이었다.




패키지 자유일정은 하루하고도 한나절뿐이었다.

하루이틀 동안 무얼 먹고 뭘 하고 놀던지 사십만 원이면 될 거 같았다. 여차하면 신용카드도 있으니까.

하지만 도착해 보니 필리핀에서 신용카드는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keyword
이전 02화첫 번째 난관 : 결정장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