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 제주에서 인천공항까지 고난의 행군

고독한 여행자가 길 위에서 깨달은 점

by 유랑

왜 떠나야만 했을까.

오전 아홉 시에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왔다.

제주도에서 해외여행 떠나는 건 꽤나 긴 여정이었다.




보홀행 비행기 출발시각은 저녁 일곱 시 반.

인천공항 여행사 미팅이 오후 네 시 반. 인천공항에 가려면 일단 김포공항으로 가야 했다.

제주발 비행기는 기상악화로 결항되거나 출발시간이 미뤄지기 일쑤이므로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떠나야 했다. 육지에서 태어나서 서울과 수도권에서 삼십여 년을 살았건만 제주도민이 된 이후로 육지는 막연하게 복잡하고 두려운 곳이 되었다. 하물며 해외라니 말할 것도 없었다.


- 나는 왜 가고 있는 걸까.

- 거기 가면 뭐가 있길래.


택시를 타고 제주공항으로 가면서,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행 리무진을 기다리면서 내내 생각했다.

배낭을 메고 캐리어 하나를 보호자처럼 꼭 붙들고 서서, 인천공항에서 여섯 시간 가까이 대기하면서,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었다.

가봤자 별거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계속 나아가야 했다.

가야 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나는 자유로워졌으니까.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아무 데도 안 가고 집에만 틀어박혀있는다면 자유라는 건 의미가 없었다.

가고 안 가는 게 오로지 내 선택에 달려있으니 가야만 했다. 외롭고 힘들다고 머뭇거린다면, 첫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아무 데도 못 간 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김포공항행 비행기는 결항이나 지연 없이 칼같이 도착했다. 김포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버스정류장에는 인천공항 가는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제주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네 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겨우 두 시간 만에 주파해 버렸다.

인천공항에는 즐거워 보이는 젊은 커플이나 귀여운 어린아이를 동반한 화기애애한 가족들 투성이었다.

혼자 해외로 가는 사람은, 나뿐인 거 같았다. 게다가 나이도 제법 든 볼품없는 중년여자는.


시선을 45도로 떨어뜨리고 앞만 보면서 걸었다.

나는 혼자였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세상에는 처음부터 나만의 것이 없었다. 노래가사처럼 오직 내 슬픔만이 나의 것이었다.

패닉이 올 징조가 보였다. 불쾌한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식은땀이 흐르고 몸이 떨렸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뭘 가질 것인지는 오로지 나의 선택이었다.

슬픔을 가지려면 슬픔을 갖는 거고 기쁨을 가지려면 기쁨을 갖는 거였다.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지금 이 순간으로 내가 끌어오는 거였다.


눈앞이 환해진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들었다. 등을 쭉 펴고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과거에 내가 행복했다면 백 프로 행복했던가.

가장 행복하던 시절, 신혼여행 갈 때도 행복과 불행은 기껏해야 8:2 아니면 7:3 정도 아니었을까.

나는 성격도 더럽고 그때도 시시때때로 짜증이 났는데. 나보다 잘난 사람 보면 비참했고 세상이 온통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 투성이었는데.

그러면 이혼하고 여행 가는 지금은 어떤가. 백 프로 불행인가. 아니라면 1:9 또는 2:8 정도로 불행한 건가.

나는 매일 글을 쓰고 수영장도 가고 한라산 등산도 히는데. 그러니까 하루의 절반 정도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지내고 나머지 절반에도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도 갔다. 밤마다 책도 읽는데.

여행 떠나는 지금도, 기쁨과 슬픔 중에서 선택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여행 떠나는 자, 유랑하는 자. 유랑작가.

머물러있는 이는 내가 아니므로 혼자서도 길을 떠나는 자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이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등에 짊어진 배낭이 가벼워지고 주위가 환해졌다.


두 시간 일찍 도착해서 인천공항 카페에서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아쉬운 맘으로 노트북을 닫고 여행사 미팅장소로 가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전자항공권을 받았다. 항공사 데스크에서 짐을 부치고 탑승권도 받았다. 친절한 직원은 창가와 복도 쪽 좌석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하겠냐고 물었다. 창가 쪽 좌석 탑승권을 쥐고 국제선 탑승시각을 기다리면서 게이트 옆 카페에서 또 글을 썼다.

고독한 여행자의 깨달음이 찾아왔던 순간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행복은 기다려봤자 오지 않았다.

지나간 불행을 곱씹는 짓은 어리석은 것,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호흡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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