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권리 찾기

1인 투어는 안된다고요?

by 유랑

보홀에서의 첫날 아침,

여섯 시에 눈을 떴다.

수면이 부족하면 체력과 기억력이 급속도로 저하되므로 충분히 자 둬야 했다. 옆방에서 한국인 여행객이 짐을 싸면서 와글거리는 기척이 들렸지만 눈을 질끈 감고 아홉 시까지 더 잤다.



첫날 오전 일정은 스킨스쿠버 체험이었다.

이백삼십 불짜리 스킨스쿠버 옵션을 판매하기 위한 형식적인 체험일정이었다. 가이드는 미소를 지으면서 스킨스쿠버를 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뱃멀미가 심한 데다가 귀가 아파서 다이빙은 안 하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그러면 다이빙 체험뿐 아니라 첫날 일정은 모조리 패스하고 리조트에서 푹 쉬는 건 어떠냐고 했다.

점심, 저녁 식사도 하지 말라고?

나는 자유선택사항인 스킨스쿠버 옵션투어만 제외하고 나머지 일정은 참여하겠다고 했다. 가이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점심때 리조트 로비로 나오라고 했다.

정해진 일정은 좋으나 싫으나 다 해야 하는 게 패키지여행인데 이번 경우에는 나 하나만 위해서 밥을 챙겨주고 투어를 진행하는 게 귀찮은 모양이었다.


룸으로 돌아와서 일기를 쓸까 말까 하다가 일단 외출 준비부터 마치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다 입고 나자 그전에 수영장부터 갈 걸,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내일부터 하면 되지 뭐.

크로스백에 약간의 현금을 챙기고 모자를 쓰고 나가서 리조트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여행사에 추가비용을 내고 풀액세스룸으로 업그레이드를 했건만 내 방은 맞은편 객실과 마주 보는 구조였다. 전망이 더 좋은 방들도 많았다. 수영장과 바로 이어진 풀액세스룸이면서 건너편에 건물이 없고 초록빛 정원이 보이는 객실들이었다.

가이드에게 정원뷰 객실로 바꿔줄 수 있냐고 카톡을 보냈다. 알아봐 주겠다고 했는데 기다려도 답이 없었다. 다음날 만났을 때 물어봤더니 풀부킹이라서 못 바꿔준다고 했다. 별로 성의가 없어 보였다.

호텔 로비에 직접 문의해 볼까도 생각했다. 비수기라서 객실은 대부분 암막커튼이 굳게 쳐져 있었다. 필리핀인 직원들은 친절했고 파파고 번역을 통하면 의사소통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다 어차피 큰 상관없다고 쿨하게 단념했다. 그냥 며칠 머무를 방이었다.


보홀 팡라오섬은 공항과 해변, 리조트 밀집지역이 가까이 있었다. 리조트에서 공항까지 차로 10분, 알로나비치까지는 차로 5분밖에 안 걸렸다. 리조트 근처에도 식당이나 상점들이 많았다. 가이드를 따라 점심식사 하러 간 식당은 리조트 바로 길 건너편 마사지샵 건물 이층이었다.

꽤나 널따란 식당 안은 무더웠다. 벽에는 아이유가 활짝 웃는 참이슬 소주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테이블마다 꽉 찬 한국 관광객들을 보자 여기가 보홀인지 제주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옆 테이블은 일행으로 보이는 한국인 두 가족이 차지했다. 어른들과 아이들이 한꺼번에 먹고 마시며 대화하느라 왁자지껄했다. 나 혼자서 한 귀퉁이 사 인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가이드가 어딘지 짠한 표정으로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제주에서도 늘 혼자 밥을 먹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안 괜찮을 리가 없었다.

종업원에게 망고 스무디까지 기운차게 추가 주문했다. 요리가 나오자 구운 닭다리를 들고 사진에 이어 동영상까지 열심히 찍어대기 시작했다. 블로거의 직업병이 도진 탓도 있지만 혼자 여행할 때나 혼밥 할 때 휴대폰 카메라는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패키지여행 첫날 현지식 점심식사는 로스트치킨과 닭꼬치, 새우와 야채튀김, 공심채 나물과 찰진 마늘밥, 미역국까지 나왔다. 평소 요리하기도 귀찮고 칼로리 제한도 하느라 그림의 떡이었던 탄수화물과 튀김을 실컷 먹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나는 여행이었다.


팔 년 만의 해외여행으로 보홀 패키지는 적당했다.

기본적인 스케줄이 정해져 있고 일정은 별로 빡세지 않았다. 필리핀은 한국보다 한 시간이 늦었는데 평소에도 늦게 자는 편이므로 시차는 적응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러나 혼자만의 해외패키지여행에는 한 가지 예기치 못한 함정이 숨어있었다.

6월 말 보홀은 비수기라서 같은 날 여행 온 인원이 나와 다른 가족 다섯 명뿐이었다. 가격대가 높은 옵션투어 스쿠버다이빙을 안 하겠다고 했더니 가이드는 내가 원했던 나팔링 스노클링 일정도 잡아주지 않았다. 한 명 만으로는 차량과 인원을 동원해 봤자 남는 건 없고 귀찮기만 하나 보았다. 원래부터 투어는 2인 이상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여행 첫날 일정이었던 노스젠빌라 선셋투어도 안 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을 텐데. 혼자라도 가겠다고 나섰다가 나는 첫날부터 눈치 없는 손님으로 찍히고 말았다.




그렇든 말든, 미리 속사정을 알았더라도 가고 싶은 데는 가야 했다.

여행자의 권리는 소중하니까.

keyword
이전 06화일단 떠나고 본 보홀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