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청년과 단둘이 선셋투어
첫째 날 저녁, 노스젠빌라 선셋투어.
가이드는 구름이 잔뜩 끼어서 석양은 글렀고, 비를 쫄딱 맞을지도 모른다면서 안 가는 게 낫다고 대놓고 말했다.
나는 보홀에서 저녁산책을 꼭 하고 싶었다.
평소에도 저녁에 동네산책을 나가는데 보홀에서는 더더욱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았던 맹그로브 나무를 직접 보고 싶었다. 수평선 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대나무 다리를 걸어서 바다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싶었다. 먹구름만 보거나 비를 맞아도 상관없었다. 비옷 입고 한라산도 가는데 리조트 정원 산책을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우산을 쓰고라도 노스젠빌라에는 꼭 가야 하겠다고 하자 가이드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현지인 가이드와 둘이서 다녀오라고 했다.
오후 네 시 반, 호텔 로비에서 필리핀인 가이드를 만나서 툭툭이-필리핀 삼륜차 택시-를 타고 노스젠빌라로 향했다. 테마파크 관람차처럼 철제 지붕과 양옆의 칸막이 문만 있을 뿐 창문이 따로 없는 차였다.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붐비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매연이 섞인 열풍이 얼굴로 불어왔다.
검정 선글라스를 낀 가이드에게 이름과 나이를 물었더니 필리핀인 청년 N은 스무 살이고 현지여행사에서 삼 년째 한국인 가이드의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구릿빛 피부에 하얀 치아가 보이도록 웃는 인상에 눈치도 빠르고 싹싹했다. 짤막한 단어로 한국말을 하는데 듣는 건 대부분 이해하는 눈치였다.
노스젠빌라에 도착하자 N이 입장권 팔찌를 건네주고, 앞장서서 길안내를 해 주었다. 바다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와 잔잔한 수면에 정신을 팔다가 사진을 찍는 동안 N은 그림처럼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포토존이 나올 때마다 N이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손짓으로 불렀다. 나는 늘 혼자 다녔고 풍경사진만으로 블로그를 썼으므로 내 사진은 굳이 남길 필요도 없었고 어색했지만 그의 친절을 물리치기 어려워서 대충 포즈를 취했다.
땅거미가 내리는 산책로에서 쌉싸름하면서도 향긋한 향기가 났다. 옅은 계피향 같기도 했다. N에게 무슨 냄새냐고 묻자 맹그로브 나무에서 나는 향이라고 알려주었다.
얕은 바다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가 신기해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화려한 깃털의 앵무새가 있는 오두막에서도 한눈을 팔았다. N의 눈치를 볼 때마다 그는 천천히 둘러봐도 된다고 웃으며 말했다. 저녁식사 시간에 가기로 했는데 늦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했더니 싱긋 웃으면서 ‘괜찮아요’라고 했다. 여행 왔다가 사진을 안 찍어준다거나 걸음 속도 때문에 싸우는 커플들을 수없이 봤는데, 이렇게나 친절한 동행은 처음이었다.
맹그로브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잔잔한 바다 위 대나무 다리는 수평선 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회색빛 하늘은 청색으로 변해갔다. 저녁 해는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서쪽 수평선의 진회색 구름 사이로 밝은 장밋빛이 살짝 비칠 뿐이었다.
대나무 다리 끝에 서서 사진을 찍고 노천카페로 가서 코코넛주스를 주문했다. 음료 한 잔이 패키지여행상품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 혼자 마실 수 없어서 N에게 지폐 몇 장을 건네주고 산미구엘 맥주라도 한 잔 마시라고 권했다. 술은 안 마신다며 손사래를 치던 N이, 음료라도 사 주고 싶다고 거듭 청하자 망고주스 한 잔을 받아왔다.
노스젠빌라 선셋브리지 커플석에 N과 나란히 앉아서 어두워져 가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보홀의 일몰 타임은 여섯 시 십분.
한국보다 한 시간 반 일찍 해가 졌다.
석양은 거의 안 보였건만 보홀로 여행 온 가족들과 친구들과 커플들로 테이블은 만석이었다.
사방에서 각양각색 언어들로 대화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이 내린 진청색 하늘과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뒤로하고 대나무 다리를 돌아 나왔다.
헤어지기 전에 N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한 명의 고객을 위해서 두 시간을 할애한 그에게 매너팁을 얼마나 건네야 할지 몰라서 십 달러 한 장을 주었다.
예의 바른 청년은 멋쩍어하더니,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뱃멀미에 도움이 될 거라면서 호핑투어 가기 전에 미리 먹으라고 멀미약을 주었다.
그 덕분에 다음날 배 안에서 멀미를 안 했다. 스무 살 필리핀 청년의 속 깊고도 고마운 배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