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 여행의 꽃, 패키지관광

통조림 데워먹는 맛, 발리카삭 호핑투어

by 유랑

2일 차 일정은 배를 타고 나가서 스노클링을 하는 호핑투어였다.

일곱 시 이십 분 호텔 로비에서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게으름 부리다가 리조트 조식을 한 번도 못 먹어볼까 봐 서둘러 식당으로 나갔다.




보홀 더스토리 리조트는 소박한 3성급 숙소였지만 깔끔하고 잘 관리되어 있었다.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똑 소리 나는 가성비 숙소였다. 조식도 호텔 뷔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한 끼 먹을 만큼 필요한 것만 나왔다.

토스트와 오렌지주스, 원두커피, 얇게 썬 수박, 은색 스테인리스 냄비에는 소시지와 야채볶음, 불고기가 나왔다. 다음 날 메뉴는 불고기 대신 닭볶음탕만 빼고 나머지는 똑같았다.


나는 좀 피곤했다. 전날밤 잠을 거의 못 잤다.

객실에 비치되어 있는 황갈색 커피믹스 Kopiko를 마셨던 게 화근이었다. 맥심커피믹스와 비슷하게 달콤하고 뜨거운 커피는 입에 착 붙었다.

올해 들어 카페인 분해능력이 제로에 가깝게 떨어진 거 같았다. 커피는커녕 녹차나 말차라테 한 잔만 마셔도 잠을 못 이루기 일쑤였다.


가이드를 따라 리조트를 나와서 대가족 여행자 한 팀과 차를 타고 해변까지 갔다.

트럭 뒤칸에 양옆으로 벤치 두 줄이 있고 천장과 칸막이가 있는 필리핀의 마을버스라고 했다.

딸과 사위, 어린 손주들과 함께 왔다는 할머니는 나에게 혼자서 해외여행을 오다니 용감하다며 덕담을 했다. 용감해서 혼자 온 건 아니고, 같이 갈 사람이 없으니 혼자 온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친절한 할머니 앞에서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할머니라고 해봐야 나보다 열 살쯤 많을 거였다.

어린아이 둘과 남편, 친정엄마에 둘러싸여 있는 삼십 대 여자는 소녀처럼 가냘프고 예뻤다.

혼자서 여행 온 나는 함빡 웃음 짓는 대가족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혼자서 자유롭게 여행하는 나를 부러워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해변 쪽으로 하얀색 배가 다가오자 기다리던 관광객들이 수영복과 래시가드 차림으로 바다로 들어가서 배에 올랐다.

잔잔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던 배는 파도가 치기 시작하자 크게 출렁거렸다.

여행사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주의사항과 일정을 알려주었다. 선글라스를 낀 덩치 큰 남자가 우스갯소리를 할 때마다 뱃전에 두 줄로 앉은 빨간 구명조끼를 입은 승객들이 킬킬 웃었다. 멀미가 나기 쉽다는 뱃머리에는 콩나물처럼 키만 쑥 자란 가무잡잡한 필리핀 소년 세 명이 쪼르르 앉아있었다.


아침 일찍 멀미약을 먹었으므로 멀미는 하지 않았지만 털털거리는 모터 소리와 기름 냄새 때문에 파도 소리나 바다내음은 느낄 수가 없었다. 수영복에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털털거리는 배를 타고 가느라 가만히 있어도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원래 내향형이라서 사람 많은 곳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같기도 했다.

거북이가 서식하는 포인트로 가는 도중에 돌고래를 몇 번인가 보았다.

제주도에서 돌고래를 보았을 때는 먼바다에서 자유롭게 원을 그리며 뛰는 돌고래의 지느러미 끝만 보고도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감동했는데 보홀에서 본 돌고래는 그저 그랬다.

사람이 너무 많았고 엔진소리는 시끄러웠고 멀미약에 반쯤 취한 데다가 수면부족까지 겹쳐서 짜증만 났다. 바로 가까이에서 돌고래의 눈을 보기까지 했는데도 그냥 여기 바다에는 원래 돌고래가 있나 보다 시큰둥했다.


바다거북 포인트에 도착하자 배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모터를 끄고 멈췄다.

긴 오리발을 장착한 필리핀 소년 세 명이 각각 여행자를 네 명씩 맡아서 구명보트를 끌어주었다. 나는 어린 딸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와 함께 필리핀 소년을 따라서 스노클링을 했다. 스노클에 자꾸만 바닷물이 들어와서 눈이 아팠다.

필리핀 소년이 멀찍이 헤엄치는 바다거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다 밑 모래에 엎드려 있는 바다거북도 보았다. 둘 다 갈색 바위덩어리처럼 보일 정도로 시야가 안 좋았다. 한국에서 스노클을 챙겨 올 걸 후회가 들었다.


배로 돌아가서 스노클에 물이 들어온다고 하자 다른 것으로 바꿔주었다. 착용한 상태로 숨을 들이마셔서 압착이 되면 문제가 없는 거였다.

그 다음번 포인트에서 스노클링 할 때는 한결 편안하게 바닷속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방수팩을 씌운 아이폰으로 밝은 파란색 물고기가 떼 지어서 드나드는 하얀 산호를 찍으려고 애쓰자 필리핀 소년이 손짓으로 휴대폰을 목에 건 끈을 풀어달라고 했다. 의아했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휴대폰을 가져가서 긴 오리발을 너울거리면서 물고기에 다가가서 동영상을 찍어 주었다. 물속에서 터치가 잘 안 돼서 나는 사진을 거의 못 찍었는데 그 소년은 요령이 있었는지, 여러 번 시도하며 무척 애써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달러씩 단체로 걷는 팁과 별도로 수중 사진을 찍어 준 소년에게 고맙다며 일 달러짜리 세 장을 건넸다.

소년이 교정틀을 낀 앞니가 보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앳된 얼굴이 열대여섯 살 정도로밖에 안 보였는데 본인은 열아홉 살이라고 말했다.

털털거리는 뱃전에 앉아있는 소년들의 뒷모습 너머로 파도가 밀려와서 하얗게 부서졌다.

해변으로 돌아와 배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미소로 배웅하는 소년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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