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했던 장면을 현실로 만드는 자유여행의 마법

나팔링리프에서 정어리떼와 헤엄치기

by 유랑

보홀패키지 3일 차 자유일정.

패키지여행은 3박 5일이 대부분이었는데 보홀은 특이하게도 4박 6일 패키지가 가끔 있었다.

하루는 온전히 자유일정이었고 식사도 리조트에서 제공되는 조식뿐이었다.




패키지여행 자유시간에는 가이드가 추천하는 옵션투어를 반강제로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들었다.

나팔링투어를 하고 싶다고 말해봤지만 비수기라서 같이 갈 인원이 없고 1인으로는 진행이 안된다고 했다.

처음에는 막연히 한 번 가볼까 했던 나팔링이 안 된다니까 더 가고 싶어졌다. 그곳에는 엄청난 정어리떼를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보홀까지 왔는데 나팔링엔 꼭 가보고 싶었다.

해외여행 블로거들은 현지 샵을 통해서도 나팔링 호핑투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위험하진 않을까. 혼자 가서 여권 맡겨놓고 스노클링 하다가 수장당하면 어떡하지. 혼자서 동남아 여행하던 여자들이 사고를 당한 건 다 본인 탓이라고 비웃지들 않던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가 혼자서 배낭하나메고 세계일주여행을 하는 여자들이 떠올랐고 한때는 나도 그랬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 포털사이트에서도 나팔링투어 상품을 팔았다.

상품판매 게시판에 1인도 되냐고 문의를 남겼다. 가능하다는 답변이 달렸다. 카톡 아이디를 알려주면서 결제하고 예약사항을 남기면 픽업도 해준다고 했다.

객실 창밖으로 수영장을 보면서 오분쯤 망설였다.

- 나팔링 스노클링, 혼자 갈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가야지. 여기서 못 가면 앞으로 해외여행 가더라도 현지에서 투어는 못 가는 거잖아.

- 한국 포털사이트를 통해서 여행상품 카드결제하는 거니까 혹시나 살해당해서 바다에 떠다니더라도 범죄추적 하기는 쉽겠지 뭐.


눈 질끈 감고 카드결제를 해버렸다.

예약신청서를 쓰는 도중에 패키지여행 와서 현지업체와 조인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생각났다.

여행사 가이드가 수시로 상기시키기도 했던 사항이었다.

패키지여행으로 왔는데 현지여행사 상품을 이용하는 건 상도덕에 어긋난다는 상식에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자유일정 시간에는 식사가 안 나오고 음식점도 혼자 가야 하는데 그 옆 마사지샵 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다 보면 스노클링샵도 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내 경우엔 옵션투어가 1인 진행은 안 된다고 해서 부득이하게 따로 가는 건데.

빠르게 상황판단을 마치고 나서도 가이드 눈치가 보였다. 픽드랍은 리조트가 아니라 근처 식당으로 와달라고 예약신청서를 고쳐 썼다.


픽업 나온 청년들은 앳되고 귀여웠다.

필리핀에서 나 혼자 스노클링 하겠다고 덤비다가 새우잡이 배로 팔려가는 거 아닌가 혼자서 불안해했던 망상이 웃길 정도였다.

운전기사와 고프로 촬영을 해주고 스노클링을 도와줄 가이드가 함께 왔는데 이동하는 동안 통성명을 하고 소소하게 대화도 나누며 안면을 텄다.

필리핀 청년의 고향은 세부였고 보홀 스노클링 샵에서 일한 지 이 년째라고 했다. 샵에는 한국인 매니저가 있으며 사장도 한국인이라는 말에 꽤나 안심이 됐다.


소심한 여행자가 큰맘 먹고 감행했던 나팔링 스노클링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너무나! 멋진 시간이었다.

배를 탈 필요도 없이 스노클링 샵에서 몇 발짝 걸어가자마자 나팔링 절벽 아래 바다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다. 스노클을 끼고 오리발을 신자마자 바로 입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햇살이 눈부신 바다에서 바로 정어리떼를 만났다. 반투명한 회색 물고기들은 회오리바람처럼 바닷속을 휘젓고 다녔다.

수십 번이나 물고기 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스노클 상태도 좋았고 긴 오리발을 대여해 줘서 헤엄치기도 편했다.

정어리들은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서 손을 뻗으면 만져볼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코앞으로 쇄도하다가도 유연하게 비켜가는 물고기들은 내 손이 움직이는 속도를 우습게 알고 빠르게 헤엄쳐서 비켜났다.

밝은 햇빛이 바닷물 사이로 투명한 유리막대처럼 빛났다. 나팔링 바다에서는 내가 작은 정어리 한 마리와 다름없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물속에서는 숨도 못 쉬는 작디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걸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스노클링 가이드는 내 주위에서 헤엄치면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주다가 산호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너무 멀리 갔으니 돌아오라고 하기도 했다.

그가 수신호를 할 때마다 시간이 다 된 걸까 깜짝깜짝 놀랐다. 한 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그 시간이 끝나버리는 게 가슴이 저릿하게 아플 정도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스노클링 빨대에 호흡을 의지해야 하는 육십 분은 지상에서처럼 쏜살같이 흘러가진 않았다.

오리발을 움직여 정어리떼 주위를 돌았다. 정어리떼들도 내 주위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무심하게 돌았다. 푸른 바다에서 끝도 없이 헤엄을 쳤다.


수면 위로 나와서 오리발을 벗으려는데 수심이 급격히 깊어지는 바다가 초록빛과 짙푸른 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일분만 물고기에게 인사하고 오겠다고 했더니 필리핀 청년이 픽 웃으면서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다.


다음날 여행사 가이드가 자유일정 하루 잘 보냈냐며 뭘 했냐고 물었을 땐 리조트에서 수영도 하고 근처 과일가게도 가보고 잘 놀았다고 뻔뻔하게 말했다.

여행사 옵션투어 반값도 안 되는 비용으로 혼자 나팔링 스노클링 가서 훨씬 더 좋은 장비에 고프로 촬영서비스까지 받았다는 얘기는 일절 함구했는데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보홀패키지 전일 자유일정 3일 차 한 시간의 일탈.

바닷속에서 정어리떼와 휘돌아 헤엄칠 때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정어리 무리에서 눈부신 생명을 보았다.

순환하는 생명은 영원했지만 개별적인 생명에는 끝이 있었다. 나팔링에서 헤엄치던 나의 시간이 뚝 끊어지던 순간이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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