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호화로운 식사
보홀에서 한 끼 정도는 기억에 남을만한 식사를 하고 싶었다. 나팔링 스노클링 다녀온 날 저녁에 툭툭이를 타고 알로나비치로 향했다.
필리핀의 택시 툭툭이는 가벼운 삼륜차로 가까운 거리에 타고 가기 편리했다. 리조트 앞에 언제나 툭툭이 한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요금은 백 페소.
리조트에서 알로나비치까지 1.8km밖에 안되므로 제주도에서라면 거리 구경도 할 겸 걸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길은 좁고 무더위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보홀에서는 계속 툭툭이를 탔다.
보홀을 찾는 한국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알리망오, 즉 게요리였다.
해산물을 좋아하므로 가격대가 있더라도 한 번 먹어볼까 했는데, 네티즌들의 품평은 게는 껍질 무게가 많이 나가서 가격은 비싼데 먹기도 불편하고 먹을 게 별로 없다고 했다. 반면에 왕새우 요리는 맛있으면서 먹기 편하고 양도 많다고들 했다.
일단 메뉴를 왕새우로 결정하고 나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과 현지인 레스토랑 두 군데 중에서 후자로 골랐다. 현지인 레스토랑 라모이는 호불호가 있다는 평이었지만 기왕 해외여행 왔으니까 한국식 보다는 보홀식에 더 호기심이 당겼다.
여행사 가이드가 저녁에 뭐 할 거냐고 물어왔을 때, 라모이에 갈 거라고 했더니 '글쎄요, 거긴 좀 비싼데.' 하면서 게리스 그릴이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시켜보라고 했다.
고기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그럼 라모이 가려면 불쇼 시간에 맞춰서 가보세요. 여섯 시 전에 가야 웨이팅 안 할 거예요.'라며 지나가는 말투로 알려주었다.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그의 조언은 꽤 도움이 되었다.
저녁 여섯 시.
툭툭이 기사가 차를 세운 곳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번화한 길가였다. 와플 가게와 아이스크림 가게에 한눈을 팔면서 라모이가 어디 있는지 둘러봤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구글맵을 손에 들고 걸었지만 상점가 주변을 빙빙 돌기만 했다.
병원에서 일하는 직원처럼 연분홍색 상하의 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여자들에게 '익스큐즈미, 웨얼이즈 라모이?' 하며 어설프게 묻자 한 명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저기 보이냐고 말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이자 다른 한 명이 내 손을 잡고 앞장을 섰다. 두툼한 갈색 손을 타고 전해지는 체온이 무척 따스했다.
밧줄로 바리케이드를 쳐놓은 노천무대 모퉁이를 돌아가자 가게 앞에 해산물과 저울이 놓인 음식점이 나왔다. 인파로 꽉 찬 식당 출입문 위쪽에 매달린 작은 간판에 빨간색 글씨로 LAMOY라고 쓰여 있었다.
간호사 복장의 덩치 큰 여성에게 연신 고맙다고 말하자 '마사지?'하고 말하면서 명함을 건네주었다. 알로나비치 거리에서 유니폼을 입고 호객하는 여인들은 마사지숍 직원들이었다.
칠월초 보홀의 저녁 기온은 한국과 비슷했다.
무더위가 남아 있었지만 햇살이 걷히고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야외 테이블에 나와있기 좋았다. 시끌벅적하게 저녁식사하는 인파들로 꽉 찬 실내로는 애초부터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마침 야외무대 앞 이인석 테이블이 비어있어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종업원에게 왕새우를 가리켰다.
새우요리는 네 가지 소스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주문 최소단위는 삼백그램.
소스 네 가지 맛이 어떨지 전부 궁금했다. 하지만 블랙페퍼와 버터갈릭, 스위트칠리, 케이준 네 가지를 전부 다 시킬 순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 가지만으로 끝낼 순 없지!
왕새우 육백그램 여덟 마리를 버터갈릭소스와 스위트칠리소스 두 가지로 요리해 달라고 했다.
파인애플 스무디까지 주문을 마쳤건만 직원은 내 눈을 쳐다보며 식사는 어떻게 하냐며 마늘밥? 깡꽁? 하며 끈질기게 물었다. 속으로 밥은 안 먹어도 될 거 같은데 싶으면서도 의사전달을 제대로 할 방법을 몰랐다. 메뉴판을 훑어보다가 BEST라고 표시된 면요리 하나를 가리켰다.
중국식 시푸드 레스토랑 라모이는 요리가 나오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노천테이블에 앉아서 파인애플 스무디가 다 녹을 무렵에야 면요리부터 나왔다. 닭고기 고명을 듬뿍 얹은 당면 같은 BAM-I 누들은 양도 많았고 맛도 나쁘지 않았다. 이어서 왕새우요리가 나왔다. 고소한 냄새가 작렬하며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왕새우 요리는 엄청나게 맛있었다.
껍질을 반으로 갈라서 튀긴 왕새우 한 마리가 손바닥만 했다. 껍질은 꼬리까지 바삭했고 속살은 오독오독 단단했다. 버터갈릭 왕새우는 고소하고 달콤하면서 느끼한 풍미가 황홀할 정도로 크리미 했다. 피망을 곁들인 스위트칠리 왕새우는 깔끔하고 매콤했다.
면요리도 충분히 괜찮은 편이었지만 왕새우 양이 너무 많아서 누들은 두어 젓가락 먹고 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신나게 새우를 까는데 노천무대에 불이 켜졌다. 쿵짝쿵짝 음악이 나오더니 사방에서 관객들이 모여들어 의자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불쇼가 시작되려나 보았다.
횃불을 든 여자 무용수들이 줄지어서 무대 위로 올라가더니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늘씬한 미녀들이 횃불을 크게 휘두르자 화려한 불꽃이 큼지막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휘날렸다. 음악이 빨라지자 횃불의 움직임도 따라서 현란해졌다.
노천무대 주위로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입장료를 내지 않고 바리케이드 너머로 보는 구경꾼들이었다. 내가 차지한 라모이 테이블은 바리케이드 바로 앞 명당자리여서 식사를 하면서 불쇼를 볼 수 있었다.
길거리에 선 채로 불쇼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으로 무용수들의 춤을 사진이나 영상에 담느라 바빴다. 나는 편안하게 테이블에 앉아서 불쇼를 봤다. 손바닥만 한 왕새우는 한 마리만 먹어도 양이 꽤 되었다. 고소한 버터갈릭 소스와 매콤한 스위트칠리소스 두 가지 다 마음에 들었다. 왕새우를 까먹는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터갈릭 왕새우를 먹다가 느끼하면 중간중간에 스위트칠리소스 피망과 양파를 비닐장갑 낀 손으로 집어먹었다. 인파에 치일 일도 다리 아플 일도 없었으므로 여유롭게 식사를 하면서 가끔 휴대폰을 들고 현란하게 춤추는 무용수들의 쇼를 촬영했다.
헌데 맛있는 요리와 화려한 무대의 사진을 찍어봤자 즐거움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제주도 친구 L양에게 카톡으로 사진을 보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L에게 개인경비만 부담하고 같이 여행을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었다. L양은 아무리 프리랜서 일이라도 4박 6일이나 시간을 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보홀에서 내가 뭘 하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상냥한 L은 내가 카톡을 보낼 때마다 좋겠다며,즐겁게 놀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라고 답을 해줬다.
일곱 시 반에 시작된 불쇼는 아홉 시에 끝났다. 불쇼가 시작될 무렵 요리가 나왔으니까 한 시간 반동안 화려한 쇼를 감상하면서 혼자만의 식사를 한 셈이었다.
음식값은 한화로 오만이천 원.
필리핀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혼밥으로는 꽤나 거한 식사였다.
이혼하고 첫 해외여행. 보홀에, 라모이에 오길 잘했다. 근데 한국에서도 오만 원이 넘는 혼밥은 처음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혼자서는 오만 원짜리 밥 한번 먹어볼 엄두를 못 낸 내가 멍청한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고 살까.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부재중 전화내역 몇 건의 알림음이 울렸다. 대부분 스팸이었지만 오랜만에 연락한 H도 있었다. 혼자서 보홀 갔었다고 말했더니 좋았겠다며, 자신은 아직까지 한 번도 해외여행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보다 어렸지만 그래도 마흔이 넘었는데 아직 해외여행을 한 번도 못 가봤다고? 그러고 보니 L도 해외여행은 딱 한 번 베트남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고교졸업 후 바로 취업하고 바쁘게 살아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었다.
이혼하고 혼자 해외여행 간다며 청승을 떨었던 게 머쓱했다.
일상을 나눌 사람이 없는 사람도, 여행 중에 카톡하나 보낼 친구가 없는 사람도 나 말고도 많을 거였다.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이제 알았다는 것도, 오만 원짜리 혼밥은 오십이 넘어서야 처음 해 봤다는 것도, 낯 뜨거운 일이니까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몰래 글로 쓸 수밖에.
아무튼 껍질까지 바삭하게 튀겨서 풍미 그득한 소스에 잔뜩 버무려서 나왔던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라모이의 왕새우 요리는 정말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