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이 인건비가 되는 패키지여행 상품구조
보홀패키지투어 마지막 날 일정은 시내관광과 쇼핑이었다.
유서 깊은 성당 한 곳을 둘러보고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시장에 갔다가 상점 두 곳에 들른다고 했다.
바클레욘 성당은 딱 기대만큼이었다.
마젤란이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 그를 신으로 알고 모신 원주민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높은 천장에 푸른색 성화가 있는 기다란 복도에 서서 기념사진을 차례로 찍고 나왔다.
현지 시장은 그저 그랬다. 값싼 합성섬유 옷들이 가득 걸려있는 비좁은 가게 사이를 지나 파리가 날아다니는 생선가게 몇 개가 전부였다.
그에 반해 한국인이 운영하는 기념품샵은 별천지나 마찬가지였다. 크고 깨끗한 건물 안은 백화점처럼 환하고 반짝반짝했다.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한 실내에서는 은은한 꽃향기가 풍기는듯했다.
투명한 병에 든 비타민과 화장품을 쳐다보고 있는데 하늘색 셔츠를 입은 직원이 재빨리 다가와서 판촉을 했다. 휴양지 복장이 산뜻한 여행자들은 여행기념 선물용으로 가격대가 꽤나 있는 번들 상품들도 선뜻 구입했다.
나에게는 필요한 물건도 없었고 선물을 가져갈 가족도 없었다. 시간을 때우려고 사진을 찍는데 친절한 미소로 무장한 직원이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제지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떡이고 화장실로 피신해서 되도록 천천히 볼일을 보고 꼼꼼하게 손을 씻었다.
첫 번째 숍에서 뒷짐만 지고 있던 가이드가 다음번 상점은 코피노를 후원하는 곳이라고 차 안에서 운을 뗐다.
- 코피노가 뭔지 다들 아시죠? 여긴 코피노와 제피노가 있어요.
제피노? 어떤 의미인지 듣자마자 감이 왔다.
코피노가 한국 남성과 현지인 여성의 혼혈이듯이, 제피노는 일본 남성과 현지인 여성의 혼혈이었다.
일본인들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주위의 시선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 남성이 현지민 여성 사이에서 혼외자를 낳으면 최소한 양육비는 보내주고 원할경우 본국으로 데려가서 교육받게도 한다고 했다. 제피노는 성장기에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고 일본유학도 많이들 하므로 좋은 직장을 얻는다고 했다. 반면에, 코피노들은 대부분 친부가 연락두절돼버려서, 필리핀 사회에서 제피노는 귀족이고 코피노는 현지인들보다 더 가난한 최하층민이라고 했다.
두 번째로 들르는 상점은 수익금으로 코피노를 후원하는 곳이었다. 가이드는 필요한 물건이 딱히 없다면 말린 과일 간식거리라도 사 달라고 말했다.
두 번째 상점 규모는 첫 번째 숍의 절반도 안 되었지만 깔끔하고 아기자기했다. 머리가 새하얀 상점 주인도 인상이 선했고 호객하는 직원들도 없었다. 취급하는 품목은 커피원두와 꿀, 차, 천연화장품 종류였다.
뭐라도 사야겠단 마음으로 상품을 둘러보다가 깔라만시 시럽 한 병과 벌레 물린 데 바르는 연고를 골랐다. 계산대로 다가가 골라 온 물건을 내미는데, 조금 전에 가게 사장과 안부인사를 나누던 가이드가 불쑥 나타나서 아로마 연고가 쓸모가 많을 거라며 잘 골랐다고 칭찬을 했다.
지폐 삼십 불을 내고 거스름돈 칠 달러를 받았다. 플라스틱 후원함에 일 달러를 넣는데 앳된 현지인 직원이 땡큐, 하며 미소를 지었다. 절로 머쓱했다. 한국에서도 소액후원을 하고 있으므로 십 달러 정도는 넣어도 괜찮았을 텐데.
마지막 날이라서 수중에 현금이 얼마 없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패키지여행에서 한화로 사십만 원 돈이면 용돈으로 충분할 거라고 여겼는데 남은 돈이 한화로 치면 구만 원 정도였다.
필리핀 페소는 재환전 수수료를 센 데다가 남아봤자 쓸모도 없으므로 다 쓰고 가려고 예산을 딱 맞게 짰더니 빈털터리가 돼 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공항세 구백 페소와 저녁식사와 툭툭이 교통비와 팁으로 쓸 돈은 아직 남겨둬야 했다. 차 안에서 남몰래 몇 번이나 남은 지폐를 세어봤다.
가이드는 공항 가기 전에 마사지를 받으라고 권했다. 가장 싼 60분짜리 마사지가 오십 불이었다.
냉큼 그러마고 했다. 체면상 옵션투어 하나는 해 주어야 했다. 가이드는 60분짜리 마사지가 없어졌다면서 그냥 90분 마사지를 60분 가격으로 해주겠다고 했다. 정말 감사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지폐를 내밀었다.
가이드 월급이 형식적인 수준이고 수입 대부분은 옵션상품 판매와 상점에서 받는 수수료라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오십 불짜리 마사지 하나로는 서운할 지도 몰랐지만 할 수 없었다. 보홀로 출발하기 전에 여행사에 선입금한 발라카삭 호핑투어와 데이투어는 이익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여행상품 약관에 쇼핑이나 옵션투어는 선택사항이라고 버젓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십사만구천 원에 항공권과 숙박과 관광을 포함한 패키지여행 상품을 판매하면 마진이 남을 리가 없었다. 일본의 경우 패키지여행상품이 두 배는 비싸다면서, 우리나라 패키지여행 상품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가이드의 씁쓸한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쇼핑이 가이드 인건비라고 한들, 필요 없는 물건을 사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우리나라 여행사 상품도 합리적인 수익구조로 재편이 되었으면 좋겠다. 서로가 난처하고 피곤하기만 한 눈치싸움 더는 할 필요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