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여행은 떠나도 좋고 안 떠나도 좋은 것

by 유랑

이혼하고 해외여행이라고?

제목을 붙이고는 혼자서 부끄럽기도 했다.

이혼이 뭔 자랑이며 결혼한 세 쌍 중에 두 쌍이 이혼한다는 판국에 이혼이 또 뭔 대수라고.




그럼에도 이혼이 나의 일이 되었을 때 헤쳐 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이혼을 겪은 다른 분들도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 거라는 마음으로 제목을 정했다.


스무 해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혼자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지는 데까지 꼬박 한 해가 걸렸다.

미혼일 때처럼 일박이일이라도 혼자서 짧은 여행을 떠나기까지 그로부터 다시 두 해가 더 지나야 만 했다.

물론 그사이 고마운 지인들의 초대로 일박이일 또는 이박삼일씩 캠핑을 했다. 우도와 가파도 등 제주도 주변의 섬 여행을 간 적도 있었다.


제주도 안에서나마 여행을 갈 정도로 에너지가 생기고 나자 보홀 여행을 결정했다.

블로그를 쓰는 일을 하면서 제주도 안에는 안 가본 데가 없는데 팬데믹 이후로 다들 해외여행을 가는 주위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혼자 해외여행 가는 건 난생처음으로 해외여행 갔던 스물아홉 살 때보다 더 떨렸다. 그때도 나는 혼자였고 달랑 배낭 하나 메고 유럽으로 떠났는데도 그땐 젊음의 패기가 있었기에 두렵지 않았나 보다.

중년에 접어든 나이에 이혼하고 다시 홀로 서는 과정은 성인이 되면서 부모에게서 독립하던 청년시절과도 유사한 점이 있었다. 무엇이든 나 혼자서 감당해야 했고 누구나 겪어야 할 외로움을 견디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살아온 세월만큼 경험이 쌓였지만 젊음의 낙관과 미래에 대한 설렘은 사라졌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엄청나게 커졌다. 나는 여전히 어리석고 나약했다. 하지만 쓰디쓴 회한과 수많은 시행착오 덕분에 삶에는 끝이 있으므로, 어떤 괴로움이나 기쁨도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찌 보면 나홀로 해외여행은 사치스러울 수도 있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도 있을 텐데 혼자만의 여행 경험을 글로 쓰는 것 자체가 송구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스물아홉 살 때 내 힘으로 번 돈으로 혼자 유럽에 다녀왔던 첫 해외여행이 남모르는 자부심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이혼하고 떠난 첫 해외여행도 내게는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었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어딘들 가봤자 별거 없고 해외여행에서 겪었던 대부분의 일은 일상에서도 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하루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든지 눈부신 여행이 될 수 있단 것도 알았다. 여행은 떠나도 좋고 안 떠나도 좋은 거였다.


다음번에는 휴양지가 아닌 순례여행을 떠나고 싶다.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가고 싶어서, 십 년 전에 읽다가 말았던 파올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다시 펼쳐 들었다. 나는 너무 평범해서 끔찍한 불행 같은 건 오지 않을 거라 믿었던 순진하고도 무모했던 시절, 사이비 광신도의 헛소리처럼 보였던 책이 이번에는 영감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소설로 다가왔다.




보홀은 행복한 커플들과 가족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물놀이를 하며 즐기는 휴양지였다.

다음에서 순례길을 따라 배낭을 메고 뚜벅뚜벅 걸으리라 상상을 해본다. 고생길이 뻔할 다음번 여행을 떠올릴 때면 기분 좋은 노스탤지어가 찾아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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