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데이투어 안경원숭이 보호센터와 초콜릿힐

인스턴트 여행의 꽃 패키지관광 2편

by 유랑

여행사 가이드가 내내 찬밥 쳐다보듯 나를 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날 가이드는 데이투어에 참여하는 건 나 혼자뿐이라고 말했다.




내심 당황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이번 여행은 혼자 하는 거니까.

처음부터 데이투어엔 기대가 컸다. 사진에서 본 초콜릿힐은 초록빛 원뿔들이 키세스 초콜릿처럼 뾰족뾰족 솟아있었다. 이파리가 커다란 나무에 매달린 안경원숭이들은 주먹만 한 눈이 신기했다.

필리핀에서만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자연과 동식물을 직접 보고 싶었다. 패키지여행 예약할 때부터 미리 옵션투어도 선입금했다.


새 차 냄새가 폴폴 풍기는 팔 인승 여행사 승합차가 도착하자 필리핀인 청년 가이드는 조수석에 자리 잡고 널따란 2열 뒷좌석을 나 혼자 덩그러니 차지했다. 초콜릿힐까지 두 시간 정도 걸리고 타르시어 안경원숭이 보호구역엔 중간에 들른다고 했다.

반짝거리는 신형 승합차가 아스팔트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다가 울퉁불퉁한 시멘트 길을 지나갔다. 도심을 벗어나자 진흙 위로 수면이 반짝이는 필리핀의 논과 시골 집들이 보였다.

운전기사와 가이드는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새 차로 드라이브를 즐기는 듯했다.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다가 잠깐씩 졸기도 하다가 안경원숭이 보호센터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무더위와 바글거리는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현지인 가이드를 따라가는데 매표소 주변은 노란 안전모를 쓴 인부들이 전기톱에 불꽃을 튀기며 공사를 하느라 몹시 시끄러웠다. 바로 옆에는 멸종위기의 안경원숭이는 소음에 매우 민감하므로 조용히 관람하라는 안내문이 뻔뻔하게 붙어있었다.

바나나나무 사이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으면 걸음을 멈췄다. 일제히 바라보는 시선만 따라가면 조그만 안경원숭이가 두려운 듯이 나뭇잎에 몸을 숨기고 나무줄기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삼 미터 앞 나뭇잎 아래에 숨어있는 조그마한 안경원숭이의 모습을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휴대폰 카메라로 확대해서 최대한 밝게 렌즈를 조정하면 겨우 형체를 알아볼 정도였다.


실제로 본 안경원숭이는 별로 귀엽지 않았다. 보송보송한 갈색 캐릭터 인형과 달리 털이 거의 없는 회색 몸은 커다란 쥐새끼처럼 보였다. 가느다란 꼬리도 쥐꼬리 비슷하게 흉측했다.

안경원숭이 보호구역은 이십 미터나 될까 싶을 정도로 짧았다. 칙칙한 바나나 나무에 주먹만 한 혹처럼 붙어있는 거무스름한 덩어리 몇 개를 본 게 전부였다.

웬만한 쇼핑몰만큼 커다란 기념품샵에는 안경원숭이 봉제인형과 키링, 열쇠고리, 티셔츠, 가방, 간식거리 등 온갖 물건들을 팔았다. 쇼핑몰을 운영하기 위해서 안경원숭이를 키우나 싶은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져갔다. 페소화가 얼마 남아있지 않아서 기념품은 그림의 떡이었다. 별로 본 것도 없는데 그냥 가기도 아쉬워서 실물과는 다르게 갈색 털이 보송보송하게 귀여운 안경원숭이 키링 하나를 샀다.


시내에서 안경원숭이 보호센터까지 차로 한 시간, 초콜릿 힐까지 다시 한 시간이 더 걸렸다. 앞 좌석의 필리핀 청년 둘은 사이좋게 수다를 떨었고 나는 또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초콜릿힐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은 이백십사 개. 밸런타인데이를 본떠서 개수를 맞췄다고 했다. 제주도 오름보다 더 낮은 높이라서 금방 올라갔다. 계단 중간 정자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그나마 관광지 분위기를 냈지만 그마저도 우수가 가득해서 우울했다.


전망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뾰족한 초록색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휴대폰 카메라로 간간이 사진을 찍으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필리핀인 가이드가 포토 포인트로 안내해 주고 손가락으로 초콜릿힐 꼭대기를 가리키는 포즈를 취하게 하고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주었다. 그러더니 전망대 위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돌아가면 된다고 했다.


이게 다라고?

봉오리 몇 개가 솟아있는 풍경은 글쎄… 솔직히 집에서 매일 보던 한라산 능선만도 못했다.

차를 타고 두 시간이나 가서 하이킹도 못하고 전망대 올라가서 사진 몇 장 찍고 끝이라니 허무했다. 제주도 동쪽 오름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면 오름 두세 개는 직접 올라가고 분화구도 볼 수 있는데. 제주도가 워낙 좋은 곳이다 보니 거기 살다 보면 웬만큼 유명한 관광지 정도로는 눈에 차지도 않나 보았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는 거지 뭐.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나무에 매달린 안경원숭이도, 초콜릿힐 봉우리를 향해 손을 뻗는 사진도 포토샵으로 만든 장면 같았다. 유명한 관광지의 실체가 여행광고 사진 한 장에 압축해서 보여준 풍경이 전부라니 뻔한 사실이 왠지 억울했다.

내심으론 하루 종일 어디서나 무리 지어 다니는 중국인과 한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혼자 걸으면서, 하다못해 필리핀인 운전기사와 가이드도 드라이브를 즐기고 매표소 직원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 나누는 장면을 보면서 외로움이 평소보다 더욱 사무쳤던 걸지도 몰랐다.


날이 어두워진 후 보홀 시내에 도착해서 가이드와 운전기사에게 인사를 매너팁을 삼 달러씩 건네는데 필리핀 청년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첫날 노스젠빌라에서처럼 십 달러를 기대했나 보았다.

보홀에서 팁 뿌리고 다니는 게 한국인 관광객 호구 만드는 짓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고 남들처럼 일이 달러 선에서 적당히 해야겠다 싶었는데 하루 종일 일한 가이드 입장에선 서운한가 보았다. 실은 여행 마지막날이라서 남아있는 현금이 얼마 없었다. 그래도 팁은 넉넉히 챙겨줄걸. 십 달러라고 해 봐야 커피 한두 잔 값인데. 두고두고 마음이 안 좋았다.




안경원숭이 보호구역과 초콜릿힐에서 떠들썩하게 몰려다니던 관광객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즐거웠는지는 모르는 거였다.


따지고 보면 옵션투어에 선입금했다는 이유로 단돈 오만 원 받고 울며 겨자 먹기로 다섯 시간 동안이나 차량과 운전기사, 현지인 가이드까지 제공해야 했던 여행사 측이 가장 억울했을지도 몰랐다.

세상은 원래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닌 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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