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큼 싸지 않았던 필리핀 물가

보홀에서 저녁거리 쇼핑하기

by 유랑

슈퍼마켓에서 음료수와 과자 몇 가지를 샀더니 만원쯤 나왔다. 과일가게에서 주섬주섬 고른 세 가지 과일도 만원 정도였다.

체감상 한국의 편의점, 마트와 별 다를 바 없었다.




보홀여행 둘째 날은 저녁식사가 불포함이라서 리조트에서 슬슬 걸어 나와서 동네구경을 했다.

근처에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고 오분 정도 더 가니까 과일가게가 나왔다.

망고와 열대과일들을 구경하다가 웃통을 벗은 덩치 큰 주인에게 큼직한 애호박처럼 생긴 과일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현지어로 솰라솰라 알려주었다. 멍한 내 표정을 보고는 ‘스위트’라고 말했다.

과일이 달콤하면 된 거지.

처음 보는 과일 두 개와 망고 세 개, 바나나 세 개를 샀다. 천 페소 지폐를 건넸더니 잔돈이 없냐고 물었다. 전날 구멍가게에서 음료수 사고받은 동전을 내밀자 지폐 육백페소를 거슬러주었다.

과일가격은 만 원.

망고나 바나나는 무척 싸다고 들었는데 나머지 과일 두 가지가 비싼 건가?

전날 구멍가게에서는 포카리스웨트와 캔음료 두 개, 쿠키, 아이스크림을 샀다. 그때도 만 원쯤 나왔다. 필리핀 현지인 가이드가 옆에 있었으므로 바가지를 씌운 건 아닐 거였다.


필리핀 근로자의 한 달 임금이 한국 돈으로 삼십만 원에서 오십만 원 정도라고 했는데, 막상 나가보니 페소가 금방금방 사라졌다. 물가가 이런데 필리핀 사람들은 그 돈 벌어서 대체 어떻게 먹고사는 걸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십 대 이십 대 시절을 떠올려보니 답이 나왔다.

팔십 년대까지 우리나라도 월급 백만 원이면 엄청난 고소득자였다. 일용직이나 서비스업으로는 한 달에 삼사십만 원 벌기도 힘들었다.

외식은 졸업식 때 짜장면이 다였고 불고기나 케이크도 일 년에 한 번 생일날에나 볼까 말까 했던 거였다.

그때 사십 년 후에는 수학여행으로 해외를 가고, 콜라만큼 비싼 생수를 누구나 사 먹고, 여행 한 번 가면 맛집투어에 1일 3 카페가 기본이 될 거라고 말했다면 누가 믿었을까.

필리핀 슈퍼마켓에서는 1회용 세탁세제나 섬유유연제를 팔았는데 서민들은 큰 용량을 살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가가 비싸므로 소비 자체를 못 하는 거였다.


하지만 경제적 풍요가 행복을 가져다준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돈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서울에서는 무한비교 경쟁에 빠져서 불행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제주도로 오기 전까지는 나도 그랬다.

여행 중에 만나본 필리핀 근로자들은 밝고 성실했다. 내가 운이 좋아서 좋은 분들만 만났을 수도 있지만 다들 친절했고 서툰 한국말로 설명해주기도 했다.

서비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적은 팁이라도 드리면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패키지여행에는 현지식이 몇 번 나왔는데, 메인메뉴가 로스트치킨이건 새우나 야채튀김이건 쌀밥에 공심채 나물이 밥과 김치 격으로 항상 따라 나왔다.

필리핀의 일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한국의 두 배 수준이라고 했다. 메뉴가 무엇이든 언제나 밥이 나왔다. 심지어 마지막날 패스트푸드점에서 후라이드치킨 한 조각과 제로콜라 세트를 주문했을 때도 포장지에 싼 쌀밥 한 덩어리가 나왔다. 말 그대로 밥심으로 사는 거였다.

나는 밥보다 빵을 좋아해서 필리핀 최대의 프랜차이즈 빵집 줄리스에도 한 번 들렀는데 빵 하나 가격이 이삼백 원 정도로 무척 저렴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빵집처럼 겉바삭속촉촉에 갖은 재료로 향긋하고 달콤한 맛에 크리미한 질감이 아니라 그냥 뻑뻑한 밀가루맛이었다.




동네구경을 마치고 리조트로 돌아와서 잔디밭에 떨어진 하얀 히비스커스 꽃을 주워서 객실로 가져갔다.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는 서늘했고 달콤한 꽃향기가 났다. 유리문만 열면 수영장이었다.

티브이 앞에 과일과 빵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사진을 찍었다.

망고와 바나나와 빵 세 개를 먹고 나서 유리문을 열고 나가 수영을 했다.

눈앞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비교하는 삶은 사는 게 아니었다. 남들보다 앞서가려고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이 가장 불행했다.

수면 위에 누워서 필리핀의 하늘을 보면서 배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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