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렇게는 못해
고 2때 내가 좋아했던 영어선생님은 가끔 끼고 다니던 통기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이었는데
어느 날 그랬다. “커피는 블랙이지!"
그때만 해도 커피:프리마:설탕=2:2:2이 불문율(?)이었던 때라 ‘블랙커피라? 뭐지?' 하며 나도 낭만에 끼어들고 싶었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건 다, 무조건, 당연히 멋진 걸 거야! 하며
그날로 쪼르르 내려가 교내 자판기 앞에 이르렀다.
동전 덜커덕, 삐이--, 착, 쪼르르
내 손에 쥐어진 조그맣고 따뜻한 종이컵
그 안에 살랑대는 까만 물
한 모금 호로록~~ 웨이엑~~ 이게 뭐지?
이걸 왜 먹어?
왜 낭만적이지 않지. 흠.
그러나 얼마가지 않았다.
수험생이 된 난 졸음을 쫓기 위해 사약 같은 커피를 한두 모금 홀짝이기 시작했고
그 까만 물에 중독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었다.
그때 한창 커피전문점이 성업 중이었다.
나는 친구랑 여기저기 생겨나는 커피전문점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우린 커피를 향유했고 서태지와 김광석을 노래했다.
그 후로 가끔 위가 심하게 너덜너덜 탈이 난 며칠 외엔 커피를 거른 날이 없다.
하루에 서너 잔은 기본, ‘난 커피 먹어도 밤에 잠 안 오고 그런 건 없더라?'
이런 막말을 (?)(!) 쏟아내며 대여섯 잔을 마신날도 많았다.
커피는 어쩜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괜한 걱정에 잠 못 이루고 맞이한 아침에도,
큰 수술 후 며칠 쉬고 어그적 입원실에서 내려와 병원 1층 카페에서 맞이한 한잔도,
고된 여행길 짐 틈비구니 속 꼬깃해진 커피 스틱 하나 잔에 부을 때도,
유난히 무거운 마음의 출근길 차 안에서도 책상에 도착해 마실 커피 한잔 생각에 짐을 덜 수 있었던
그런 위로였다.
금단현상은 뚜렷하다.
눈에 졸음이 차오르고, 나른하고 , 멍하고, 머리가 팽팽 돌지 않음은 물론이요
스멀스멀 짜증이 난다.
혈당스파이크가 솟는 오후엔 참지 못하고 꼭 투약(?)해야 하며 그릇장 열어 잔 하나 고르고
드륵드륵 원두를 갈아 쪼르르.. 또옥또옥.... 커피를 내려 그 어여쁜 잔에 따라 마시는 아침이란!
그렇게 난 나이를 먹었다.
오래도록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증세의 경중은 오락가락 하지만 통잠을 5시간 이상 자본 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니 심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상추효소, 타트체리, 비타민 D, 마그네슘, 국화차 등등은 물론 이런저런 병원 처방도 경험해 보았다.
최근 독일 여행 간 지인이 멜라토닌을 사 와 보내준다길래 사양하지 않고 냉큼 땡큐
더불어 그녀는 맹공을 퍼부었다.
'하루에 서너 잔씩 커피를 마시며 잠오기를 바라냐
나이가 몇인데'
그래 곰곰이 한번 되짚어 보았다.
스무 살도 안 되는 나이부터 거의 매일 몇 잔씩 마신 커피, 몸 구석구석 카페인에 절어있어서 잠이 안 오는 거 아닐까.
젊은 날에는 그 무엇이든 이겨냈지만 이제 몸에서 신호를 보내는 거 아닐까.
그래 단호하게 딱! 끊어볼까.
정말 잠 좀 푹 자고 싶다.
잠이 부족하고 수면의 질이 나쁘면 살도 안 빠진다는데.. 며칠 동안 곰곰이 나 자신과 자못 진지하게 타협하고 있다 .
커피를 끊어야 한다...... 고 한다.
결론!
그러나 난 그렇게는 못하겠다.
일상의 유일한 소소한 그 기쁨까지 버릴 순 없단 말이지.
그 깊고 다크하고 풍부한 원두 아로마의 향기가 자꾸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아서 괴롭단말이지.
하루에 한잔, 그것도 오전에 마시기! 이렇게 합의 보자.
실천 4일째
#커피예찬
#우리커피한잔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