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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수 Feb 14. 2023

인성 발달의 첫걸음 '연민' - 박기범 <독후감 숙제>


오세영 [부자의 그림일기] 일부

오늘은 운동회 총연습을 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한테 혼났다. 무용을 할 때 우리 2학년은 전부다 무용복을 입었는데 나만 안 입었다.

선생님이 내일모레 운동회 날은 꼭 무용복을 사서 싸가지고 오라고 하셨지만 나는 엄마한테 아직도 말을 못 했다. 7천 원이나 든다는데 엄마한테 말하면 얼마나 걱정하실까 생각하니 아무래도 말을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렇지만 걱정이 된다. 다른 애들은 다 좋다고 하는게 나는 하나도 좋지 않다. 운동회 같은 게 없었으면 좋겠다.     

 박기범 <독후감 숙제> 일부


<독후감 숙제>는 박기범의 동화집 [문제아]에 수록되어 있는 여러 작품 중 하나입이다. 이 작품에는 특이하게 오세영의 만화가 몇 페이지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의 단편 만화집 [부자의 그림일기] 중 일부입니다. 학생들이 박기범의 동화를 읽으면서 만화가 오세영을 만나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세영은 우리나라 만화가 중 만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몇 안 되는 작가 중 단연 최고입니다. 요즘 학생들이 읽는 환타지류의 만화와는 많이 다릅니다. 오세영은 만화로 리얼리즘을 구현한 최고의 작가입니다.

 

작가 박기범은 동화 작가로는 좀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2003년에 한국반전평화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전쟁 중인 이라크로 건너가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는 만큼 행하는 멋있는 분이 아닙니까. 문학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문학으로 점수를 따고 출세를 위해 요점 정리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박기범 선생은 문학을 가르친다며 문학을 죽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따끔한 침을 놓아 주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에게는 문학이 추구하는 정서 교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치는 데 참 좋은 작품이고 교사에게는 문학교육의 의미를 다시금 되세기게 만든 작품입니다.

 

[독후감 숙제]를 읽으면 어떤 마음이 됩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이 연민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주인공 여자 아이가 참 불쌍하다고 그럴 것 같습니다. 뻔뻔한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났다고 하는 학생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연민과 분노는 다른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슬로우의 이론으로 설명을 해 봅시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망을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관계의 욕구, 명예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5단계로 나눕니다. 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를 욕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욕구들을 칠정 희노애락애오욕(七情 ; 喜怒愛樂愛惡慾)과 연결하여 설명해 봅시다. 매슬로우가 말한 각각의 욕망 단계는 칠정의 각 정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봅니다. 생리 안전의 욕구는 기쁨과 성냄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관계 명예의 욕구는 사랑과 미움의 감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지막 욕구라고 할 수 있는 자아실현 욕구는 즐거움 슬픔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독후감 숙제]를 읽을 때 생기는 마음, 연민과 분노는 관계 명예의 욕구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학 작품을 감상하면서 갖게 되는 감정은 아름다운 마음을 기른다고 생각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성과 감성 의지를 조화롭게 잘 기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인 감성을 잘 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감수성이 예민해지도록 다양한 경험을 통해 풍부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풍부하게 느낀다는 걸 매슬로우 이론과 칠정론을 결합하여 설명하는 게 아주 쓸모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보통 욕구가 충족되거나 결핍될 때 정서적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 정서적 반응이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서 점점 복잡해지고 분화됩니다. 생리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기쁘고 그런 욕구가 결핍되면 짜증이 납니다. 이런 정서적 반응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리 아름다운 정서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거의 동물적 수준의 자극 반응 패턴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 보다 인간적인 걸 아름답다고 본다는 걸 전제로 할 때 그렇습니다. 문학은 그런 정서를 잘 다루지 않습니다. 승패와 폭력을 소재로 하는 대부분의 오락물이 바로 이런 말초적 정서를 자극합니다. 문학은 이런 오락물과는 다른, 좀 고차원적인 정서를 다룹니다.

 

성장기의 학생들은 관계 명예의 욕구와 결부된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다룬 문학 작품을 많이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순리하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자기 부정과 이타심이라는 고차원적인 마음에서 생깁니다. 어릴 때에는 이길 때 신나고 지면 화나는 단순한 정서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사춘기 무렵이 되면 누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마음이 묘하게 반응하는 신비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정서는 분명 한 차원 높은 마음 상태입니다. 보다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 아닌 누군가 패배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정서 상태는 고귀한 마음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연민의 감정은 뻔뻔한 승리자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함께 합니다. 다시 말해 연민은 정의감과 직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감은 더 고차원적인 정서 상태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더 고차원적인 정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고 지금은 사랑과 미움 연민 분노의 감정을 많이 경험해 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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