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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록 Jul 05. 2019

뜬금없는 하루


우여곡절 끝에 빈에 무사히 도착했고, 이튿날부터 관광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을 두고 잘츠부르크와 할슈타트만 다녀오는 실수를 범했던 지난 여행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잘츠부르크와 할슈타트는 진짜 별거 없었는데... 철저히 여행 가이드북을 신봉했던 내가 괜히 다시 원망스럽다. 

빈을 꼭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여러 미술관에서 작품으로 만났던 클림프 때문이었다. 클림프의 많은 작품 중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키스를 직접 눈으로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TV에서 인터넷에서 수없이 만났던 작품이지만, 실제로 눈으로 담는 경험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클림프의 키스가 전시된 벨베데레 궁전을 목적지로 정했다. 직접 눈으로 만난 ‘키스’는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림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했다.  

빈의 일정은 다른 도시보다 여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철저히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처음 온 도시였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곳을 가보고 싶었지만, 겨우 이틀 동안 빈을 모조리 섭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어머니와 나는 체력적으로 너무도 약해진 상태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빈에 방문하면 꼭 가본다는 오페라 하우스 공연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미리 공연을 예매하지 않은 이상, 공연을 서서 봐야 하는 입석 표를 사야 했고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서서 본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큰 무리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오페라 하우스는 밖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지나가는 길에 들리기로 했다.   

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밝았고 이미 방문했던 벨베데레를 제외하고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부른 궁전을 고민하다가 쇤부른 궁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교통비가 월등하게 비싼(1회권 2.4유로 약 3천원)것을 감안하면 시내에 위치한 호프부르크 왕국이 더 메리트가 있었지만 쇤부른 궁전의 사진이 더 화려한 것을 보고 쇤부른 궁전을 택했다.

쇤부른 궁전의 입장료는 어른 20유로, 여느 관광지와 견주어 봐도 비싼 금액이었다. 그래, 언제 또 이곳을 오겠어하는 마음으로 결제를 하려고 평소처럼 애플 페이를 켜서 카드 리더기에 대려고 하자, 갑자기 직원이 나를 막았다.

“여기 카드기에는 애플 페이 결제가 불가능해, 혹시 마그네틱 카드 있니?”

벙쪘다. 지금까지 어느 관광지를 가도 애플 페이를 사용할 수 있었고 심지어 지하철의 티켓 판매기에서도 사용 가능한데 빈의 최고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쇤부른 궁전에서 안 된다고? 당황한 나는 주머니를 뒤져 카드를 가지고 왔는지 확인했다. 아무리 뒤져봐도 카드는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입장료만큼의 현금 역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그럼 혹시 키오스크에서는 작동 가능한지 물어봤고, 직원 역시 당황했는지(애플 페이를 믿고 현금과 카드를 안 들고 다니는 내가 신기했는지도 모른다) 키오스크 근처 직원에게 나를 인계해줬다. 키오스크에서 결제하려고 보니 역시 애플 페이가 작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기에 더욱 어이가 없었다. 직원은 실망한 나를 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 역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발길을 돌렸다.  

쇤부른 궁전은 지금까지 방문한 다른 궁전들과 다름없이 과하게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건물이라고 해봐야 겨우 2~3동에 불과한데, 정원에 해당하는 부지는 건물의 거의 10배 정도 넓었다. 다행히 쇤부른 궁전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유료였지만, 정원을 거니는 것은 무료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궁전을 1시간쯤 거닐고 다시 시내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로 향했다.

지하철에 돌아와 쇤부른 궁전에서 쓰지 못했던 애플 페이로 1회 탑승권을 구매한 뒤, 시내 오페라 하우스 근처 역으로 이동했다. 계획은 오페라 하우스 외관을 살펴보고 슈테판 대성당을 본 뒤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오페라 하우스 사진을 찍으면서 어머니께 지나가듯 여쭤봤다. 

“엄마, 오페라 하우스 공연을 입석으로 보면 4유로라던데요”

나는 당연히 어머니가 ‘다리도 아픈데 입석은 힘들지’하고 대답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그 정보에 관심을 가지시는 눈치 아닌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나는 그럼 오늘 무슨 공연을 하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아무것도 검색하지 않고 온 날 공연이 있었다. 심지어 빈에 머무는 일정에서 유일하게 공연이 있는 날이 오늘이었다.     

급히 인터넷과 가이드북을 뒤져서 입석 표를 사는 곳을 찾아냈다. 우리는 입석 표를 파는 곳으로 가서 줄을 섰고, 티켓 부스가 열리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입석 표를 사러 들어가면서도 나는 공연을 보기 싫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정이 추가된 데다, 오페라도 아닌 발레 공연인 것도 그랬고, 게다가 나는 집에 가서 손흥민 선수 출전이 확실시되는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공연 시간은 오후 7시 30분,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이미 축구 경기는 거의 끝나 있을 시간이었다. 이런 마음이 가득했음에도 공연을 보기로 한 것은 너무 기대된다는 어머니의 반응 때문이었다. 마치 내가 토트넘 경기를 보러 갔던 날의 표정처럼 말이다.      

1시간 반여를 기다린 뒤, 티켓 데스크가 열렸다. 여느 때처럼 애플 페이로 결제하려는데 앞사람들을 보니 모두 현금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한두 명이 그랬다면 넘어갔을 텐데 모두가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을 보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내가 가진 현금은 겨우 5유로. 3유로짜리 티켓이라고 해도 2장을 구입하지 못한다. 망했다 싶은 마음으로 앞사람을 따라가다가 문득 내 뒤에 기다리는 분이 한국 사람인 것을 떠올려냈다. 

“정말 죄송한데, 혹시 10유로만 빌릴 수 있을까요? 제가 한국 돈으로 바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분은 현금이 넉넉했고, 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그렇게 10유로를 받고 즉시 계좌이체 해드렸고, 우리는 무사히 입석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입석 표를 발급받고 바로 공연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입석은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목도리나 스카프로 자리를 표시해야 한다. 자리 표시까지 완료한 뒤 건물 밖으로 나가 숨을 돌렸다. 

돌이켜보면 오늘 하루 내내 아무것도 계획대로 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기대 이상의 행복을 얻었다. 쇤부른 궁전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고, 아낀 시간 덕분에 공연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심지어 우리는 공연을 볼 계획이 전혀 없었지만 결국 모르는 사람에게 돈까지 빌려 가면서 표를 샀고 공연을 봤다. 예상치 못한 것들로 가득 채워진 하루였으나 그것 나름대로 어머니와 나에게는 추억이 되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하루, 뜬금없는 하루였다. 하지만 운수 좋은 날이었다. 마치 계획에서 어긋나서 새로운 계획이 생긴 것처럼 꿈같은 하루를 보냈다. 

흔히들 사람들이 꿈꾸는 여행의 범주에 가장 잘 어울린 날이었다. 불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알고 보면 행운이었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행복을 잔뜩 선물 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하루. 나에게 있어서 불운이 밀려오는 하루는 곧 실패한 하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귀중한 하루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실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불운으로 가장한 행운이 찾아오는 날에는 내가 느꼈던 절망과 패배감 이상으로 감당하기 힘든 행복이 찾아오곤 한다. 지금까지 여행을 많이 했다고 느꼈음에도 나는 여전히 여행을 잘 모르겠다. 덕분에 여행을 계속 기대할 수 있다. 어떤 하루가 나에게 주어질지. 어떤 행복이 나를 찾아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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