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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여운코끼리 May 21. 2021

오늘도 넌 내게 위로를 건넨다.(두 아들맘의 육아생활)

#03 새 학기 증후군

올해 입학을 한 첫째는 아이다운 엉뚱한 면도 있지만 제법 생각 깊은 편이다. 가령 내가 전학을 앞두고 "첫째야, 전학 가면 어떨 것 같아. 친구들 없어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아?"라고 물어보면, "괜찮아요. 아쉽지만 친구는 또 사귀면 되니까요."라고 제법 그럴듯하게 대답을 한다. 내가 이어서 "친구는 어떻게 사귀는데?"라고 물어보면 아이 특유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웃으면서 같이 놀고 다정하게 말을 걸면 금방 친구가 돼요. 맞죠?"라며 환하게 웃는다. 또 어떤 날은 지쳐 쉬고 있는 엄마를 보며 "엄마 힘들죠? 우리들을 길러줘서 고마워요."라고 하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다리도 야무지게 조몰락거리고, 볼에 뽀뽀를 하고 엄마 쉬라고 커튼을 쳐주나 이불을 덮어주고 자기는 조용히 방에 가서 책을 본다.


이제는 훌쩍 커서 엄마의 마음도 제법 헤아리지만, 사실 첫째는 어릴 때 미모사처럼 활짝 폈다가도 금세 샐쭉해져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아이였다. 어린이집을 가기 싫어해서 두 번이나 옮기기도 했고,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이 되면 소변을 보러 자주 간다. 때때로 대변을 참다가 팬티를 버리기도 하고, 다섯 살에 기침 틱이 오기도 했었다. 슬픈 감정도 기쁜 감정도 오래 담아두는 첫째는 한동안  엄마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쥐었다 폈다 하며 마음 졸이게 했다. 이런 첫째의 성향을 잘 알았기에, 1학년을 시작하나는 첫째를 유심히 관찰했다. 다행히 첫째는 학교를 좋아했다. 유치원 친구와 한 반이 되었고, 선생님도 무척 다정했다. 첫째도 유치원 다닐 때보다 집에 일찍 온다는 것에 만족했고 방과 후 자유로운 시간을 다채로운 놀이로 채워가며 즐거워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적응을 꽤 잘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몇 번인가 엄지 손가락을 빠는 첫째를 발견했다. 학기 니까  스트레스받을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가볍게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집 안 어디선가 구린 내가 계속 나는데 아무리 찾아도 냄새의 근원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손이 갈라지도록 빡빡 씻으며 깔끔을 떠는 녀석이었기에 처음에는 그 냄새가 첫의 몸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코를 킁킁거리던 나는 결국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다. 범인은 바로 첫째의 손가락이었다. 내가 냄새를 킁킁거릴 때부터 동그란 눈알을 굴리며 불안해하던 첫째가 바로 이실직고를 했다.


"죄송해요. 궁금해서 똥꼬를 만져봤어요."

"응? 뭐라고?"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던 나는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고, 첫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동안 내 머리에서는 지진이 났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학교 생활이 힘든 걸까?'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생각은 남편이 올 때쯤에는 활화산으로 변해서 터져 버렸다. 나는 세상이 꺼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리 와 봐. 할 말이 있어."

나의 사뭇 진지한 표정에 남편도 뭔가 눈치를 챈 건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이야?"

나만큼은 아니지만 남편도 조금은 충격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조심조심 오후에 있던 일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돌아온 남편의 답변은 아이와의 일을 잊게 해 줄 만큼 더 충격적이었다.  


"근데 첫째가 똥꼬 냄새가 궁금해서 똥꼬를 만 진 거래 아니면 우연히 똥꼬를 만졌는데 그 냄새가 궁금한 거래?"


"응?!"(당황 ×충격)


"그 둘은 달라, 그리고 그ㆍ럴ㆍ수ㆍ도 ㆍ있ㆍ지ㆍ 뭐"


처음에 나는 뭘 잘못 들었나 싶어 혼자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빵 터졌다. 예상치도 못한 남편의 답변과 그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남편의 표정을 보며, 남편의 말처럼 전까지 심각했던 일들이 정말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내 웃음이 진정되자 남편은 자기도 어렸을 적에 그런 적이 있었다며 근데 똥꼬 냄새가 궁금해서 그랬는지 가려워서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며 주석을 달아줬다.


결국 두 달이 넘는 지금까지 첫째 손가락은  향기롭게 잘 유지되고 있다. 남편의 말처럼 정말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봤던 고래 그리는 아이라는 일본 어린이 재단의 광고가 떠올랐다. 선생님이 마음속에 생각나는 것을 그려보라는 말에 아이는 도화지를 까맣게 칠한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이상이 있다고 확신하고, 선생님끼리 회의도 하고 부모와 상담도 한 끝에 아이를 정신 병원에 보낸다. 그동안에도 아이는 쉬지 않고 도화지를 칠한다. 결국 어른들은 아이가 완성하려던 게 큰 고래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아이들의 잠재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라는 문구가 뜨며 광고가 끝난다. 나와 상황은 좀 다르지만 결국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섣부르게 아이들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면에서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다.


내 아이지만 나와는 엄연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키우며 늘 기준선을 내 안으로 두고 나의 기준으로 아이를 판단하고 아이의 행동을 단정해버리고 만다.


아이와 함께 하는 모래알처럼 많은 날들 중,  오늘 거친 파도를 맞은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먼 훗날에는 깊은 심해에서 끌어올릴 수도 없을 만큼 미미해서 기억이 안 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오늘 일처럼 재미있는 야깃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아이를 키우면서 오늘 내가 되새겨 본 말, 그 말은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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