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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선생님 Nov 17. 2022

나는 어릴 때, 선생님이 싫었다.

싫었다는 말보다는 좋지 않았다고 하는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했다. 아이들은 정말 많이 늘어나 있었다. 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즐거웠다는 뜻이겠거니, 생각했다.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겁다니, 아이들에게 참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선생님과 있는 시간이 그리 즐겁지 않았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이 말을 보면 옛 선생님들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나는 어린 시절 정말 말을 안 듣는 학생이었다. 큰 말썽을 피우거나 다른 아이를 괴롭히고 때린 적은 맹세코 한 번도 없지만, 늘 교실에서 장난을 치는 장난꾸러기였다. 나는 늘 아이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수업 시간에는 집중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수업 시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인 것 같다. 집중했다면 이렇게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을 리 없다.) 지금 교사가 되어 가장 힘든 학생이 집중하지 않는 학생이니,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생각도 든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정말 많이 맞았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때리는 것이 허용되던 시기여서 그랬을까? 선생님들은 성별이나 나이를 막론하고 아이들을 때렸다. 나는 정말로 많이 맞았다. 회초리로 맞는 것은 당연했고, 새총을 가지고 놀다 걸린 날에는 새총으로 맞기도 했다. 플라스틱 자로 맞기도 했고 맨손으로 맞기도 했다. 나는 거의 매일 맞았다. 숙제를 매일 안 해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매일 혼났고, 내가 어렸을 때는 혼난다는 것은 맞는 것을 의미했다.

  맞으며 느는 것은 덜 아프게 맞는 요령뿐이었다. 한 손을 올린다든지, 교묘한 타이밍에 손을 살짝 올리거나 내리는 방법으로 덜 아프게 맞았다. 감각을 조금이라도 둔하게 만들기 위해 손을 열심히 비비기도 하고, 미리 책상에 내려치기도 했다. 정말 많은 요령이 생겼다. 그러나 그 많은 요령을 만드는 동안에 나는 숙제를 해갈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맞으면 끝이니까. 덜 아프게 맞든 아프게 맞든, 맞고 넘어가면 끝이니까.

  아이들에게 혼내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내는 것이 화내는 것으로 바뀐다면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때리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면 화내는 것을 어떻게 넘어갈지에 대한 지식이 생긴다. 화낼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든지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혼을 내야 한다. 잘못한 아이에게는 감정을 배제한 채로 이야기해야 한다. 잘못한 것을 스스로 이야기하게 만들고, 그것을 인정하게 해야 한다. 인정하는 것이 첫 번째다. 인정하게 만들고 스스로 반성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교사가 개입하지 않을 수 있다면 제일 좋다.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시간을 주면 아이는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이 화낼 때 덜 기분 나쁜 요령을 학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못한 행동에 대해 학습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다들 아이들을 잘 대해주신다. 그래서 아이들이 선생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거겠지. 아이들이 그냥 하는 말처럼 보여도 정말 사랑하기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나는 아이들을 자주 혼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나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다. 나는 많이 혼났고, 절대로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했다. (지금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바뀌어서 정말 다행이다. 내가 아이들을 때리는 시대에 선생님을 했었다면,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알았다면. 정말 끔찍한 한 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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