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딸, 아빠가 책에 줄을 긋는 이유는...

by 세상과 마주하기

책에 줄을 긋기 시작한 것은 학생 때부터이다. 그때는 공부를 잘하기 위해 열심히 그었었다. 자를 대고 형형색색의 형광펜이며 볼펜으로 규칙을 정해놓고 말이다. 제목은 노란색, 그다음 소 제목은 보라색, 가장 중요한 것은 빨간색.. 이렇게 해 놓으면 다음에 다시 암기하려고 책을 펼쳐 들어도 가물가물한 나의 암기력을 커버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찌나 이쁘게 그었던지 편집증 증세가 아니었을까.. 자로 그어진 이쁜 형광색으로 도배가 되어버린 책.


교과서 이외의 책에도 가끔씩 줄이 그어져 있다. 그러던 것이 책만 펼쳐 들면 줄을 긋기 시작한 것은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읽고 난 이후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거기서 책에 줄 긋는 대회를 본 이후부터다. 이제 수년이 지났고 한번 그은 책 위에 다시 몇 년 뒤의 줄이 한 줄 한 줄 다시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내가 그 책을 읽은 시기에 따라 그어진 줄이 다른 것이다. 왜 내가 여기에 줄을 그어 두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줄을 그었을 때는 내용이 정말 중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심증만 있을 뿐이다.


아.. 나에게도 변화가 있구나.. 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나의 삶을 찾아보는 한 방법으로 지나간 책을 뒤적여 보기도 한다. 5년 전의 나를 보기 위해, 10년 전의 나를 찾기 위해서...


옛날 공부하던 책에는 줄이 자로 그어져 있지만 다른 책에는 그냥 손이 가는 대로 그어져 있다. 책에 자를 대고 그어진 것보다는 버스가 흔들리는 방향에 따라, 내 마음의 동요에 따라 그어진 것들이 나중에 보면 더 친근감이 든다. 간혹 책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 이전의 책을 읽었던 때가 기억나기도 한다.


‘그때 난 그랬었지’


지금은 가능하면 그냥 주~~ 욱 그어버린다. 세상이 나에게 주는 교훈은 반듯하고 각진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요즘은 책에 줄을 긋는 이유가 조금 달라졌다. 내 아이에게 아빠가 무슨 생각을 했으며 말로 다 하지 못함을, 소심하지만 책에 줄을 그어두는 일로 대신하고 있다. 물론 책에 줄을 그어 둔다고 내가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전달할 수는 없지만 아이가 크면서 10대를 지나고 20대를 거쳐 어른이 되었을 때 희미하게 그어진 책의 줄을 보면서 아빠를 조금 더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다.


지금 아이에게 나를 이해시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어려운 것을 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딸아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색이 바랜 책을 꺼내 들었을 때

‘아, 내 부모도 이렇게 고민했었구나? ‘

‘무슨 이런 것에 줄을 그어 두었어.... 너무 당연한 거잖아’

‘ 아빠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그게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다만 내가 사랑한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 곁에 있었음을, 소중하게 생각했음을 작게 남아 남기고 싶을 뿐이다.


2012.11.18 이른 아침에


IMG_6529valleyoffire.JPG 2010 4 13 Valley of Fire, 네바다주. Canon T1i


keyword
이전 23화딸 세상에 맛집은 없어. 단지 맛난 사람들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