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연봉과 고용안정성 그리고 우수한 복리후생의 차원에서 은행원이라는 직업은 취준생 뿐만 아니라 부모님 세대에게도 매우 인기높은 직업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은행에 입행하던 그 공채시험에도 무려 2만명이 몰렸다는 뉴스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렇게 난 약 100:1의 경쟁률을 뚫고 은행원이 되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맞지않는 옷을 입는 것 발꿈치가 다 까지도록 작은 신발을 신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내가 그랬다.
어릴때부터 은행원이셨던 아빠를 보며 은행원이라는 직업을 친숙하게 여겼고 저축을 좋아해서 은행 가는 것을 즐겨하던 나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은행원이라는 직업은 나에게는 또다른 고통의 나날이었다.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이 이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그날, 무의식에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너무나 놀랐고 이렇게는 더이상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침표를 찍었다.
지금도 은행원을 그만두고 처음으로 따스한 햇볕을 온몸으로 느끼며 강남거리를 활보하던 그날이 떠오른다. 매우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매일 실내에서 허옇게 떠가던 내가 평일 오후 여유롭게 강남거리를 걷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항상 여직원들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했기에 정말로 아침 출근한 이후부터 저녁 퇴근 하기까지 단 한번도 지점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신발이었다는 것을 내 마음이 많이 다친 후에서야 알게되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
사실 나에게는 오랜 꿈이 있었다.
매년 나의 수첩 가장 위에 적혀져 있던 "세계일주 가기"
그렇다. 은행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나는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을 하듯, 난 성공적으로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본다.
"무섭지 않았냐고"
하지만 두려움은 용기와 종이한장 차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나는 그 누구보다 겁이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나의 의지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주었고 소심함은 안전한 여행에 대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맞지 않은 것을 다 내려놓자 마음은 편안해졌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좀 더 커졌었다. 칠흙같이 어두운 터널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마음.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팁은 그냥 해보면 되는 것이었다. 시도하기 전까지는 두려웠던 마음이 막상 실행을 하고 부딪쳐보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내가 직접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나도 세계일주 해보고 싶었는데..."
어쩌면 20대의 내가 은행을 그만두지 않고 그저 막연한 꿈으로만 생각했다면 누군가의 글을 보며 저렇게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하이힐을 벗어던졌고 등산화로 갈아신었다. 그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하이힐을 신었을 때보다 투박한 등산화를 신었지만 더 빛나던 내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그 순간이 바로 여행하던 나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