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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 Oct 18. 2021

빙하 위에서 만난 걸 크러쉬 여전사

빙하 트레킹 in 뉴질랜드 프란츠 조셉


뉴질랜드 여행을 하며 들었던 생각은 정말 천혜의 자연환경을 다 가진 나라라는 점이었다. 나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했지만 그간 이런 생각이 들었던 나라는 중국이 유일했는데 뉴질랜드 역시도 그러했다. 중국은 그 땅덩이가 넓기라도 했지 뉴질랜드는 면적도 그렇게 넓지 않은 작은 섬나라임에도 맑은 하늘과 어디를 가더래도 볼 수 있는 바다와 산 그리고 빙하지대까지. 그야말로 경이로운 자연환경의 종합 선물 세트와도 같은 나라였다.

뉴질랜드 여행은 나에게 엄청난 힐링을 선물해주었는데 그중 가장 기대가 컸고 기대에 부합했던 여행지는 바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빙하지역을 직접 올라가 볼 수 있는 뉴질랜드 프란츠 조셉 빙하 투어였다.


기대가 컸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살짝 걱정이 앞섰다. 피지컬이 좋은 서양인들 사이에서 뒤처지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가가 가장 큰 관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빙하투어 센터에서 받은 안전수칙 안내서에서 의학상 혹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도 하산하게 될 경우 소요되는 비용은 전적으로 본인부담이라는 내용을 보고서 "무조건 완주"라는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전문적인 등산장비는 그곳에서 대여를 해주었는데 한 번도 빨지 않았던 건지 땀냄새가 풀풀 나는 옷과 역시나 땀냄새에 차마 쓸 수 없는 모자까지 받아 들고 빙하로 이동했다.



우리를 하루 동안 빙하 투어를 이끌어줄 가이드는 캣이라는 이름의 여자 가이드였다. 당연히 남자 가이드 일 것이라 생각한 나의 좁은 선입견을 깨부숴주는 가이드였다. 나누어준 등산화는 가벼운 운동화에 비해 무게감이 상당했는데 8시간 이상 이 무거운 신발을 신고 빙하를 등반할 생각을 하니 뒤쳐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일부러 처음부터 선두에 서서 걸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한국인 여자가 민폐가 됐다는 말은 죽어도 듣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빙하가 시작되는 곳에 도착해서는 가방 속에  있던 빙하 등반용 아이젠을 등산화 밑에 신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빙하 위를 걷는 방법과 각종 안전 수칙들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다.


드디어 빙하로 출발.


총 40명의 인원에서 20명씩 조를 나누고 다시 그 안에서 10명씩 그룹을 만들어 각 의 가이드와 함께 빙하 위로 올라갔다. 시작 지점에 있던 빙하는 생각보다 흙이 많이 묻어 있어 내가 상상해오던 하얗고 파란 빙하가 아니라 거뭇거뭇한 먼지가 묻어있어 조금 실망을 안겨주었다. 아마도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야 내가 기대했던 빙하의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가장 앞에서 우리를 안내해주는 캣은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들어가며 올라가고 있었다. 바로 뒤에서 보기에도 참 힘들어 보였는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우리를 안전하게 빙하로 올라가게 도와주었다. 거뭇거뭇한 흙과 먼지가 묻어있는 곳을 얼마 지나지 않아 캣은 여기까지가 반일투어(Half day tour)를 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라고 알려주며 우리는 이곳보다 더 위로 올라가 더 멋지고 아름다운 빙하를 볼 수 있는 행운아들이라며 점점 지쳐가고 있는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캣의 말대로 조금 더 올라가자 확실히 처음과 비교해서도 훨씬 깨끗한 빙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캣은 계속해서 큰 곡괭이를 들고 쉴 새 없이 빙하를 부수고 다듬으며 계단처럼 만들어놓아 우리가 편하고 안전하게 빙하탐험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중간중간 낭떠러지인 듯 깊게 파인 곳도 있고 빙하가 살짝 녹아 물처럼 흐르는 곳도 있었는데 조금 더 올라가다 보니 일기 예보대로 서서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방수처리가 된 탐험복이라 젖을 리는 없었지만 안 그래도 빙하에 둘러싸여 추웠는데 비까지 내려 더 힘들게 느껴졌다. 시간이 갈수록 다리도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뒤처지지 않고 내색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캣의 뒤를 쫓아갔다.


그렇게 힘내서 쉬는 틈 없이 따라가다 보니 추위는 물러가고 어느새 땀이 나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열기가 몰려왔다. 그렇게 땀이 난 상태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앉아있는 동안 식어버린 땀에 의해 다시 추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처음에 냄새나서 쓸 수 없었던 비니와 장갑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다들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점심을 먹고 다시 힘을 내서 또다시 캣의 뒤를 바짝 쫓아 올라갔다. 미끄러운 빙하 위였지만 신고 있는 아이젠 덕분에 어렵지 않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는데 바로 캣이 앞장서 만들어놓은 길 옆으로는 낭떠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뒤쳐지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최대한 선두 조에서 보조를 맞추며 따라갔다. 웬만큼 올라갔을까. 캣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제는 하산할 시간이라며 밑으로 내려가는 스텝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한 명 한 명 캣의 지도하에 스텝 연습을 하고 나서야 내려가는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스텝이 꼬이게 될 경우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캣은 올라갈 때보다 더 긴장한 듯 보였다. 그런 캣을 보며 나도 내려가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천천히 안전하게 내려갔다.


서서히 아까 초반의 거뭇거뭇한 빙하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투어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발밑의 빙하는 사라지고 다시 처음 돌들이 쌓여있는 평지에 도착했다. 캣은 우리 팀 모두가 안전하게 평지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마지막 사람까지 챙기고 있었다. 모두가 무사히 투어를 마치고 투어버스로 향하는 길에 잠시 동안 캣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빙하 등반하는 것 어땠어?



캣은 나에게 빙하 등반이 어땠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너무나 환상적인 경험이었고 이 경험에 대해 꼭 지인들에게 말해줘서 이 소중한 경험을 나누고 싶다고 얘기해며 사실 전날 반일투어 다녀온 친구가 힘들었다고 얘기해줘서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등반을 하기 전까지는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왜냐하면 우리(가이드)가 안전한 빙산 등반을 위해 존재하니까"


캣의 이 말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여지없이 드러나 있었다.


"사실 난 오늘 네가 일하는 것 보고 정말 부럽다고 생각했어. 한국에서 나 역시 일을 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거든. 그런데 넌 이 일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였어"

이렇게 말하는 나에게 캣은 단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


"응! 난 내 일을 정말 좋아해"



캣에게도 말했지만 빙하 등반을 함께 하며 선발대로서 캣의 바로 뒤에서 종일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의 일에 대해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녀도 사람이기에 중간중간 가쁜 숨을 몰아쉴 때도 있었지만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고 나를 포함한 우리 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한편으로 퇴사를 하기 전까지 매일 지친 하루를 보내며 적응하지 못한 채 행복과 보람을 잃어가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과연 나는 내 일에 대해서 얼마나 진심이었을까. 단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닫힌 마음으로 일을 시작한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물론 결론적으로 퇴사를 하고 오랜 소원이었던 세계일주를 떠나온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불평불만을 잔뜩 가지고 있었던 나의 모습이 오늘의 빙하체험 가이드 캣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뉴질랜드 여행은 여러 가지로 나에게 커다란 힐링을 선물해주었는데 한순간도 놓칠 수 없을 것 같았던 멋진 자연환경이 그 첫 번째였고 몇 년 동안 스트레스 속에 지쳐있던 나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여유로운 시간을 준 것이 두 번째였고 자신의 일에 진심인 캣과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세 번째였다. 그리고 진정으로 자신이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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