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결혼 30주년을 앞두고 꿈꾸던 내 집을 소유하게 되었다. 부부교사 맞벌이로 30여 년을 묵묵히 어려움을 감내하고 오늘의 결과를 창조해 낸 예쁜 나의 아내에게 남은 여생을 무조건적 존경과 그 크기를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사랑으로 보답하고자 한다.
누구나 그렇듯 새로움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첫사랑이 그랬었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나누어준 우리의 아이들이 그랬다. -- 한 아이는 첫 아이의 설렘을 나누어 주었고 한 아이는 첫아들이라는 큰 감동을 나누어 주었다. -- 처음 장만한 자동차, 임용하고 박봉의 월급을 모아 장만한 286 컴퓨터, 결혼 후 6번의 이사를 마지막으로 장만한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주는 설레임의 크기를 미사여구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평생을 걸쳐 처음 가져보는 내 집에는 미처 입주 청소를 하지 못해 거실을 거닐을 때면 아직 가시지 않은 건축현장의 매캐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향기를 즐기는 것은 나의 큰 기쁨 중 하나였다. 3주간 아내의 연수로 우리들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지는 못했지만 소중한 공간에서 보내는 혼자만의 하루는 시간적 감각을 마비시킨 채 빠르게 지나가기에 충분했다. 주체하지 못할 행복함에 밤잠을 설친 아침이면 가슴 부근에서 올라오는 진동에 나도 모르게 설레었고 저녁이면 아쉬움으로 건축 관련 자료를 찾아서 늦은 밤까지 웹 공간을 표류해야 했다.
나의 첫 주택의 즐거움은 새로움을 채워 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바꾸게 된 새가구 그리고 새집과 함께 설치된 전자제품들은 신제품이 주는 화려함으로 스스로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2024년 8월 9일... 내 평생 잊을 수 없었던 날이다. 입주 전 따로 구입한 국내기업의 로봇 청소기와 의류관리기를 설치하고 오전 11시쯤 그동안 벼르던 빌트인 냉장고의 아이스메이커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 밸브를 열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 트레이에서 떨어지는 검은색의 얼음이 더럽다고 생각하면서 싱크대에 버렸다. 과연 먹을 수 있는 얼음을 만들어 내기는 하는 것일까 ? 그래도 중국도 아니고 굴지의 국내 대기업인데 국민들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일순간 쏟아졌던 불신을 차분히 잠재우고 아내를 모시러 연수원으로 출발했다. 한여름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소나기로 소중한 집이 상할까 창문을 닫고 2번 3번 확인했다. 혹시 내가 강박증이 아닐까 스스로 걱정을 하면서도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확인에 확인을 보탰다.
3시가 넘었는데도 아내가 나오질 않는다. 분명 2시 30분경에 수업이 끝났을 것인데 나오지 않는다. 아내에게 투정을 가득 담아 카톡을 보냈더니 6교시 수업이라 3시 30분이 넘어야 조우가 가능할 것이라는 답장이 왔다. 바보같이 오늘 6교시 수업이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평소보다 더 빨리 출발하여 2시간을 넘게 기다리게 되었다. 분명 내 잘못이었지만 아내에게 짜증이 났다. 결국 그 짜증은 아내에게 향했고 내 거친 말투와 표정은 순식간에 냉전의 기류를 조성했다. 그날 저녁 사소한 다툼으로 하루를 마무리지었다.
아직 아내의 연수가 1주 더 남았지만 중요한 시험이 끝난 상태라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준비하여 함께 새집으로 향했다. 차 안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차가운 표정의 예쁜 아내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굳은 얼굴로 새집의 현관문을 지나 유리로 된 중문을 열었다. 그런데...
바닥에 물이 흥건히 차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양말도 벗지 않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모든 방과 거실 그리고 부엌에 물이 차서 찰랑이고 있었다. 거실 한쪽의 새로 산 로봇 청소기는 하단부가 잠겨 있다. 하지만 걱정이 되지 않는다. 겨우 200만 원짜리에 시선을 둘 여유가 없었다. 이 거대한 수량의 발원지가 어디일까? 싱크대와 모든 수도꼭지를 확인했지만 발원지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윗집에서 이 많은 물이 떨어졌나 싶어서다.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그들에게 어떻게 보복을 할까 찰나적 적대감이 치솟았지만 그들 역시 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허망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에 냉동고의 LED창이 번쩍임이 들어왔다. 아... 순간 어제 오후 열었던 싱크대 하단의 냉동고 급수 밸브가 떠올랐다. 반사적으로 냉동고 문을 힘차게 열었더니 물이 콸콸 쏟아져 내렸다. 수만 년 동안 쌓였던 아이슬란드의 빙하가 녹아 단단하고 투명한 얼음 끝에서 쏟아지 듯 맑고 깨끗한 물이 폭포가 되어 칸칸이 흘러내렸다. 빠르게 싱크대 하단의 밸브를 잠갔다.
아내는 이 인간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녀만의 온화하게 화난 표정으로 나를 질타했다. 전 날의 냉전으로 말로 표현하지 못한 거친 말들을 눈으로 쏘아붙인 후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걸레를 들고 찰랑이는 물을 쓰레기봉투에 퍼 담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이유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분명 아무 잘못도 없는데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스스로가 위축되었다. 아내의 싸늘함에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이 많은 양의 물이 아랫집에 흘러들어 피해를 준다면 도의적인 책임뿐만 아니라 물질적 배상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들이 쏟아부을 저주가 가득 담길 살의가 두려웠다. 나처럼 그들에게도 나의 가치만큼의 노력과 애정이 담긴 대상일 게 분명했다. 그런 존재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힘든 줄도 몰랐다. 무의식이 지배한 단순한 기계적인 작업을 2시간 넘어 반복했다. 아파트 하자 보수를 위한 작업자들이 전화를 걸고 초인종을 눌렀지만 무시했다.
신속한 건조를 위해 보일러를 가동하고 에어컨을 켰다. 한여름 에어컨과 보일러를 동시에 빵빵하게 작동시키는 호사를 평생 몇 번이나 가져볼까 ? 난 지구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걸 가져보았다. 일주일 너머 지속된 호화로운 생활은 경제적 부담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집 가격에 비할까? 나무로 된 마루 바닥이 일어나고 집안 전체에 곰팡이가 가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당장의 경제적 부담은 문제가 되질 않았다. 마지막 정리를 하고 지친 몸으로 바닥에 앉았다. 세상을 잃어버린 나를 향해 아내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위로를 건냈다. 다정한 말투가 너무나 고마웠지만 위로가 들어올 만큼의 공간이 나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냉장고가 드르륵 거리더니 윙하고 작동하기 시작했다. LED창의 반짝임도 멈추었다. 이런...